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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한국을 사랑하신다고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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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데, 엄청난 낯섦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벽안의 외국인이 한국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할 때면 솔직히 조금은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실은 이 나라가 그들에게 개인적인 ‘기회의 땅’이 돼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현은 아닐까, 또는 이 사회에서 잘 지내는 수완을 얻었다는 증거는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거꾸로 서구 땅에서 십 년, 이십 년 살고 있는 한국인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살고 있는 그 나라를 사랑하기는커녕 욕하지 않으면 다행이고, 아무리 오래 지내도 뿌리내릴 수 없다는 착잡한 신세타령을 듣기 십상이다. 그런 점에서 외국인 미녀들이 우리 사회와 사람들의 약점을 꿰뚫어 보면서도 화면에서는 생글거리며 즐거운 잡담만 나누었다고 생각하면 오싹 소름이 돋는다.

2PM을 자진 사퇴하고 시애틀로 쫓기듯 돌아간 멤버는 스물두 살 재미동포 3세다. 미국 사회에서 성장한 소년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적응하기 힘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아닌 남인 이상 나와는 다른 소리를 내는 것 또한 당연하다. 이렇게 당연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참으로 문제가 심각하달 수밖에 없다.

앞서 예를 든 뉴질랜드 출신 여성이 우리 문제의 안팎을 동시에 꿰고 있다는 점이 오히려 고맙기까지 하다. 그가 지적한 말은 아주 뼈아팠다. 한국인들은 “자아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이다. 서양 문학과 문화를 꽤 오랫동안 공부해 온 이들로부터 이와 동일한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데, 놀랍게도 젊은 서양 처자가 한국인 전체에 대해 이렇게 일갈하고 나선 것이다. 서양식 절대적 개인의 관념이 희미한 우리로서는 좀 어리둥절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다.

지난 세기 1960, 70년대 우리네 풍경으로 돌아가 보면, 그 시절에는 동네 어귀에서 시비가 벌어지는 일이 꽤 잦았다. 그때마다 으레 듣게 되는 큰소리는 바로 “내가 누군지 알아?”였다. 거기에 대고 “네가 누군데?” 하고 되물었다면 그 대답은 십중팔구 “내 사돈의 팔촌이 아무개야!”였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이 대답의 21세기식 패러디 버전은 “나 E대 나온 여자야!”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한국인의 ‘자아’는 오랫동안 바로 그런 것이었을 게다. 사돈의 팔촌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자아는 없는데 말이다. 너무 오래도록, 너무 심하게 그리 살다 보니 그 미성숙한 치부가 벽안의 처자에게 순식간에 탄로나 버린 셈이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대한민국은 젊고 역동적이다. 하지만 여러모로 볼 때 어른스럽지는 못하다. 가랑비처럼 사소한 것들만 예로 들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초보 운전자에게 충고해 준답시고 차선을 바꿀 때 깜박이 켜지 말라고 가르쳐 주는 문화, 좁은 화장실에 한꺼번에 몰려 들어가 다닥다닥 줄 서야만 안심하는 문화, 창구에서 상담하고 있는 사람의 바로 뒤에 딱 붙어 있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문화, 낯선 사람에게 먼저 웃으며 인사하면 ‘꿇고’ 들어가는 게 되는 문화,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문화가 어른스럽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떼쓰지 말아야 한다. 나와 남의 차이를 인정하고 남을 존중할 수 있을 때만이 나의 존재도 공허함을 면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 단점을 지적하는 이런저런 목소리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새겨들을 수 있어야 자아가 있는 어른이다. 오랫동안 서양은 물질문명이고 우리는 정신문명이라고 주장해 왔지만, 이런 말도 이제는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는 저 인도양의 어느 나라에 돌려주는 것이 낫다. 사이비 도사처럼 “마음을 비웠습니다” 운운하지 말고, 징그럽게 “우리가 남이가” 하며 엉기지 말고, 물질적인 삶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조금은 더 삼빡하게 살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정재숙 문화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