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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의 책 넘나들기] '비너스의 마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엘리자베스 헤이컨의 '비너스의 마음' (원제 : Venus Envy) , 존스홉킨스대 출판부

육체미의 표준에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이것을 추구하기 위해 많은 재물과 시간을 쓰고 고통까지 감수한 사례는 역사상 수없이 많다.

온 몸을 문신으로 뒤덮기도 하고, 코에 구멍을 뚫어 뼈다귀를 꿰기도 하고,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발을 졸라매기도 했다.

특히 여성의 경우에 이런 사례가 많고, 이것은 여성을 재물에 가까운 종속적 지위의 존재로 보는 데 연유한 것으로 흔히 풀이된다.

현대여성은 자유를 주장한다.

용모를 향상시키려는 노력이 본인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면 성형수술은 여성의 자유를 가장 극적으로 대변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백년 전의 여성은 사회관습의 요구와 허용에서 벗어난 방향으로 자신의 용모를 꾸밀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자기 돈으로 성형수술을 받을 수 있는 젊은 여성이 부모의 허락없이 간단한 수술을 받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테네시대 역사학 교수 엘리자베스 헤이컨은 '비너스의 마음' 에서 성형수술을 20세기 혁명의 하나로 꼽는다.

인간이 주어진 운명을 스스로의 가치관에 따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성형수술의 유행을 가져왔으며, 용모의 '향상' 에 그친 종래의 미용술과 달리 용모의 '창조' 를 가능하게 한 성형수술의 발달에 따라 인간, 특히 여성의 자기인식 패턴에도 근본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미용술 혁명의 최전선이 된 미국에서도 백년 전의 여성은 립스틱 하나를 바르는 데 큰 용기가 필요했다.

80년 전만 해도 타고난 용모를 인위적으로 바꾸는 사람을 괴물로 여기는 통념이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 (1918)에 보인다. 1차대전의 전투중 얼굴이 망가진 장병들을 위한 시술에서 성형수술의 획기적 기술축적이 이뤄졌지만, 아직도 대부분 의사들은 망가진 얼굴의 회복과 타고난 얼굴의 변용을 다른 일로 생각했다.

용모의 향상과 같이 사치스러운 일은 의술의 본분이 될 수 없고, 돈을 위해 그런 수술을 하는 것을 천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주어진 운명을 뛰어넘으려는 여성의 집념은 이런 저항을 극복했다.

1890년 이래 미국의 미용시장은 10년에 두 배 이상씩 팽창했다.

1910년대에는 무자격시술자에 의한 미용수술이 급증하면서 피해자가 속출했다.

1921년 최초의 성형외과협회가 시카고에서 결성된 것은 시장수요에 대한 의료계의 굴복이었으며 이후 미용수술은 하나의 안정된 사회관습으로 자리잡았다.

현실의 질곡을 뛰어넘기 위해 사람들은 혁명을 꿈꾸지만 그 혁명이 일단 실현되고 나면 새로운 질곡 속에 자신이 갇혀 있음을 깨닫는 것이 혁명의 아이러니다.

이 아이러니는 미용술의 혁명 성형수술의 발전과정에서도 여지없이 확인된다.

아름다움의 추구가 사회규범으로 제약받고 있을 때 미용술은 여성에게 자유의 길이었다.

가장 용감한 여성들이 그 길을 열었다.

그들은 사회의 통념에 맞설 뿐 아니라 수술의 부작용까지도 감수했다.

얼굴뿐 아니라 몸매까지 임의로 바꿔주게 된 성형수술의 발달은 미용혁명의 빛나는 승리다.

성형수술의 유행이 여성참정권의 확립과 같은 시기에 나타났다는 사실도 시사적이다.

그러나 대다수 여성이 사회가 요구하는 아름다움의 표준에 압제당하고 미 (美) 의 시장에 상품으로 노출되는 지금의 현실은 백년 전보다도 더 가혹하다.

그렇다면 이문열이 말하듯 조선조의 여성이 정숙한 존재가 되기 위해 '선택' 을 한 것처럼 오늘의 여성은 아름다운 존재가 되기 위해 '선택' 을 하는 것일까. 여성의 문제, 미의 문제만이 아니다.

민주사회에 사는 현대인의 '자유' 가 어떤 실질적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돌이켜보게 하는 문제다.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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