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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밤나무 아래 서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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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골목 담장 안에는 석류가 익고 있다. 고운(孤雲) 최치원이 지은 ‘석류’라는 제목의 시가 생각난다. “뿌리는 진흙 사랑 성품은 바다 사랑 / 열매는 진주 같고 껍데기는 게 같아라. / 새콤달콤한 고것 언제나 맛볼까 / 잎 지고 바람 높은 시월이라네.” 석류가 얼른 익기를 고대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아마도 최치원은 바닷가에 서식한다는 ‘해류(海榴)’라는 석류 품종을 보았나 보다. 석류를 노래하되 ‘성품은 바다 사랑’이라 했고, 또 독특하게도 석류의 모양새를 진주와 게에 비유했다.

덩굴에는 그림자가 서늘하고 거둬들이는 일손은 바빠졌다. 토란을 베어 어깨에 메고 가는 사람도 있다. 고추를 널어 말리는 사람도 있다. 연초록의 떡잎이 막 올라온 것을 가리켜 물으니 갓을 심었노라고 한다. 그제는 옥수수 밭을 지나가다 일 나온 사람이 있는 줄 알고 목례를 하곤 슬며시 웃고 말았다. 외양을 사람과 꼭 빼닮게 꾸며 놓은 허수아비를 보았던 것이다. 여름 내내 우레가 울고 가도 허수아비는 조금도 늙지 않았다.

요즘 내가 제일로 궁금해하는 곳은 밤나무 아래다. 누군가 애초에는 밤을 수확할 생각으로 심어놓았지만 이제는 주인 없이 되어 버린 밤나무가 산에는 더러 있다. 산길을 가다 이런 밤나무 아래를 중얼거리듯 맴도는, 발밑을 살피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진 밤을 줍고 있다. 두 발로 비비듯 까서 혹은 막대기로 아람을 더 벌려 밤을 얻는다. 나는 겨우 두서너 개의 밤을 손에 쥘 뿐이지만, 밤나무 아래를 서성거리는 일만으로도 가을을 살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어제는 밤나무 아래 잠깐의 소란이 있었다. 어른들 몇이 모여 걸걸하게 웃고 있었다. 밤나무를 율동처럼 흔들어 밤을 털고 있었다. 유심히 보니 밤나무 저 깊은 곳에 올라가 있는 사람도 있었다. 꽤 나이가 많아 보였다. 가지 끝으로 점점 옮겨가 가지를 구르며 소년처럼 웃고 있었고, 목소리는 잔뜩 신이 나 있었다. 밤나무 아래에서는 떨어지는 밤송이를 피하느라 두 손을 머리에 얹고 이리저리 뛰는 어른들이 있었다. 저 어른들이 밤나무 아래서 동심을 되찾은 것처럼 나도 밤나무 아래에 서 있던 열 살 무렵의 아이로 돌아가고 싶었다. 저 밤나무를 양팔로 단단하게 껴안고 두 발에 탱탱하게 힘을 넣어 밤나무를 타고 올라가고 싶었다. 타고 올라가 밤나무 가지를 발로 구르며 벙실벙실하고 싶었다. 그러면 나와 밤나무는 누군가 이고 가는 물동이처럼 출렁출렁할 것이다.

밤나무 아래 서서 나는 지나간 가을을 다시 산다면 이 가을에 다시 해보고 싶은 일들을 꼽아 보았다. 가령 상수리나무 아래에 가서 동글동글한 열매를 줍는 일, 사과 밭에 들어가 빨간 사과를 몰래 따다 들통이 나 된통 혼나느라 사과 밭이 벌통처럼 시끄러워지는 일, 깻단을 떨어 고소한 깨알을 몇 되 얻는 일, 더 늦은 가을에는 하얀 무를 쑥쑥 뽑아 올리는 일, 햇살이 금잔디처럼 쏟아지는 묏등을 타고 가을 오후를 미끄러져 내려오는 일 등을 말이다. 이런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만석지기처럼 부자가 되는 듯했다.

여름 매미가 얼음에 대해 알지 못하듯이 나도 소견이 좁아 시절의 오고 감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여하튼 무딘 마음의 안쪽으로도 가을은 와서 끝없이 흘러가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