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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cover story] 황등 비빔밥 70년 익산 진미식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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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운데 밖에서 뭐하시는겨." 문을 빠끔히 열고 원금애 할머니(왼쪽)가 어머니 조여아 할머니를 부른다. 치매에 걸렸건만 조할머니는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굳이 자식들이 아니어도 좋다고 했다. 누구든 어머니와 자신의 70년 정성이 깃든 식당을 이어가 준다면, 지금도 비빔밥 맛을 보겠다고 식당 앞에 긴 줄을 서도록 하는 비법을 고스란히 털어놓겠다고 했다.

"비빕밤 만드는 법을 가르쳐 달라며 찾아오는 사람은 부지기수야. 근데 모두들 기술만 익히고 떠나려 들잖아. 난 식당을 잃고 싶지 않은데…."

원금애(69)할머니. 전북 익산군 황등면의 진미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황등 비빔밥'이라 불리는 육회 비빔밥으로 소문난 식당이다. 어머니인 조여아(92) 할머니 때부터 70여년간 비빔밥을 전문으로 해왔다. 시금치.쑥갓.미나리 등 야채를 밥과 함께 비빈 뒤 불에 살짝 데우고 그 위에 입에 살살 감기는 육회를 한움큼 얹어 상에 내놓는다.

식당의 출발은 일제시대 때 5일장이 서던 황등 장터에서였다. 조 할머니가 장터 일꾼들과 상인들을 대상으로 육회를 인심 좋게 듬뿍 얹은 비빔밥을 만들어 줘 인기를 끌었다. "황등 비빔밥도 못 먹어 본 놈"이란 말은 이곳 물정을 모른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했단다.

당시 큰딸인 원 할머니는 장터 부근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처녀애가 이런 곳에 오면 못 쓴다"며 말리기도 했지만 너저분한 행주치마 차림으로 덥석덥석 음식을 집어먹는 어머니가 창피해 일부러 찾아가지 않았단다.

196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진미식당'으로 간판을 내걸고 음식점을 크게 열었다. 손이 달리자 어머니는 딸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딸은 아예 시집가 충남 부여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책임감이랄까, 애틋함 때문일까. 한두 번 친정에 올 때마다 혼자 식당을 운영하는 어머니를 보면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71년 두 팔 걷어붙이고 어머니의 일을 돕게 됐고, 이때부터 음식 전수도 시작됐다. "말도 마. 그전까지 '좀 도와달라'하시던 엄니였는데, 한번 일을 시키더니 독사가 따로 없는 겨. 하루는 손님들 다 있는디 '나물 놓는 순서가 잘못됐다'며 대놓고 욕지거리에 면박을 주는데…. 을매나 서럽던지 눈이 붓도록 밤새 펑펑 울었어."

그렇게 이어온 '황등 비빔밥'은 8년 전 원 할머니가 전통문화 보존 명인으로 선정되면서 이 고장의 대표 음식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3년 전부터 원 할머니는 기력이 크게 쇠약해졌다. 툭하면 쓴소리를 퍼부었지만 한편으론 든든한 후원자였던 어머니가 치매로 쓰러진 데다 함께 음식점을 운영하던 남편마저 그해 세상을 뜨고 만 것.

황등 비빔밥의 비법을 물려주고자 자식들의 마음을 떠봤다. 하지만 건설업을 하는 두 아들은 고사하고 있는 상태다.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원 할머니. 올해가 지나면 쫄깃쫄깃한 황등 비빔밥을 더 이상 맛보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익산=최민우 기자<minwoo@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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