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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 (4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40) 대성공 '장군의 아들'

90년에 나온 '장군의 아들' 은 순전히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의 작품이다.

이사장의 권유와 의지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인 것이다.

언젠가도 말한 적이 있지만, 80년대말 해외영화제에서 거듭 상을 타면서 "이젠 뭔가 더 큰 상을 타야겠다" 는 오기같은 것이 생겼다.

이럴 무렵 나의 그런 고집, 즉 예술지향적인 작업관을 역으로 파고든 사람이 이사장이었다.

이사장은 "이제 너무 지쳐보이니 쉬기도 할 겸 다른 유의 작품을 해보자" 고 제안했다.

그게 바로 액션물인 '장군의 아들' 이었다.

이 제안을 받고 나는 몹시 불쾌했다.

"한창 갈 길이 바쁜 사람한테 엉뚱한 바람을 불어넣다니…. " 그러나 이사장의 설득은 집요했다.

틈이 있을 때마다 액션영화를 강권했다.

하도 그러다 보니 지난 일이 새삼 떠올랐다.

나 자신이 생각해도 좀 지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럼 한번 쉬는 마음으로 달려들어 볼까. " 그러나 50대말의 나이에 다시 60년대의 액션감독으로 돌아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왕년의 액션감독이었던 내가 어떻게 변해있을까. " 나도 궁금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60년대의 그 '낡은' 감독이 기성 연기자를 데리고 액션영화를 찍었다가 다시 구식이 돼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출연자 전원을 신인으로 쓰기로 마음 먹었다.

그야말로 액션물이니 배우들의 감정의 깊이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고, 높은 완성도도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나의 이런 제안에 이사장은 흔쾌히 "좋다" 고 대답했다.

김두한 역의 박상민을 비롯, 20여명의 신인이 기용됐다.

그렇게 촬영에 들어가 한참 찍다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생짜들의 연기가 역시 문제였다.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구나. " 한동안 심한 회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용케 잘 견뎌내 나의 신인기용은 또한차례 성공으로 결말을 맺었다.

나는 '장군의 아들' 을 만들면서 점차 여성화하는 남성들에 대한 연민이랄까, 그런 것들을 그리고 싶었다.

사내다운 멋스러움을 되살려 보자는 소박한 생각을 담은 것이다.

돈에 팔려가는 자기 부하의 여자를 구하기 위해 도둑질을 마다않는 사내, '권부의 심장부' 라 할 수 있는 종로통을 일본인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사내. 그에겐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의협심이 있고, 통큰 기개와 신의가 있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내라면 누구나 가까이 하고 싶지 않겠는가.

나는 그런 사내를 그리고 싶었다.

시류를 잘 읽은 덕인지 영화는 대성공이었다.

당시로서는 한국영화 흥행 최고기록인 서울관객 67만5천명을 동원했다.

90년 10월26일 '장군의 아들' 은 그때까지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갖고 있던 김호선 감독 '겨울여자' 의 58만5천명을 넘어섰다.

당시는 할리우드가 영화를 직배하기 시작하면서 한국 영화계가 심하게 동요하던 때라 이 신기록은 더욱 값진 것이었다.

'역사적인' 그날 단성사 앞에는 출연배우인 박상민.이일재.신현준이 나와 기록경신의 주인공에게 꽃다발을 주기도 했다.

거듭 밝히지만 '장군의 아들' 의 히트는 순전히 기획.제작자의 창의성이 빚어낸 것이었다.

한때 내가 액션물 감독이었음에 착안, 그래도 그 감각이 남았거니 해서 강권한 게 적중했으니 말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로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 이후 '장군의 아들' 은 나에게 '흥행' 이란 단어에도 귀를 기울일 계기를 준 작품이 됐다.

게다가 어찌보면 자칫 예술영화의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었던 그 시절, '장군의 아들' 은 온고지신의 자세를 일깨우면서 보다 폭넓은 시각을 갖게 한 성숙의 발판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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