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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3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38) 모스크바 입성

'씨받이' '아다다' 에 이어 내 80년대 영화역사의 종막을 장식한 작품은 '아제아제 바라아제' (89년) 였다.

해외영화제 연속수상. 베니스.몬트리올에 이어 이번엔 모스크바가 희소식의 진원지였다.

'월드스타' 강수연이 또 다시 제16회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것이다.

그때까지만해도 모스크바영화제는 베를린.베니스.칸과 함께 세계 4대영화제로 불릴만큼 명성과 권위가 있는 영화제였다.

나와 강수연, 그리고 제작사인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 영화진흥공사 김동호 사장이 일행을 이뤘다.

지금 동국대 교수로 있는 영화평론가 유지나씨도 그때 프랑스 유학중 합류해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유씨는 베니스영화제 때도 만났었다.

당시 모스크바 방문은 그 자체로도 대단한 화제였다.

우리와 외교관계가 없던 때라 우리 일행은 일본에 가서 그곳 소련대사관에서 일종의 '입국허가서' 를 발급 받고서야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긴장감과 설레임이 교차하는 묘한 느낌으로 소련 땅을 밟았다.

영화도 영화지만 내가 소련 땅을 '설레임' 으로 맞을 수 있었던 것은 지난날의 내 개인사 (우리나라 전체의 아픔일 수도 있다) 의 아픈 기억이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좌우익의 극한대립, 그 속에서 망가진 우리 집안. 나는 소련여행을 통해 그 좌익 이데올로기의 총본산이라는 그곳의 생활상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이데올로기가 한낱 환상이자 허구였음을 나는 이때 소련여행을 통해 절실히 깨달았다.

그런 사례들은 곳곳에서 발견됐다.

아니 삶 전체가 다 허구였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개인이 전체를 구성하는 한 부품에 지나지 않는 삶. 그것은 악몽이었다.

모스크바를 떠나 알마아타 등을 여행할 때였다.

며칠을 두고 그곳 공무원이 줄곧 우리 일행을 따라다니길래 나는 그에게 물었다.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직장에서 뭐라고 하지 않느냐" 고 했더니 그는 "괜찮다" 며 태연했다.

우리를 감시하려는 의도도 의도려니와 이런 인력낭비가 어디 있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디를 가나 호텔은 더욱 가관이었다.

채널은 하나로 고정돼 있었고, 개인의 삶은 철저히 감시당했다.

내가 묵던 모스크바의 한 호텔은 방이 무려 6천여개나 되는 큰 호텔이었는데, 방 번호가 순서대로 잘 나가다 느닷없이 엉뚱한 번호가 나오곤 했다.

방마다 있는 전화도 모두 개인전화로 호텔의 교환을 통해서는 연결될 수 없었다.

반드시 그 방의 번호를 서로 알아야만 통화가 가능했다.

아무리 일행임을 확인시켜줘도 같은 층, 이웃한 방을 절대로 배정하지 않았다.

한 사람은 20층, 한 사람은 11층 하는 식으로 분리 수용했다.

다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였다.

한번은 출세한 고려인 변호사를 만났는데, 술김에 체제를 비판했더니 한참을 듣고만 있다가 천정을 가리키면서 귀엣말로 속삭였다.

"여기서는 말 할 수 없다" 는 거였다.

술집에도 도청장치가 돼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옛날을 생각했다.

좌익 활동을 하던 사람들의 지향했던 그 결과물이 고작 이것이구나 생각하니 씁쓸했다.

과연 그때 그 사람들은 이런 결과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과연 그들의 희생이 무슨 값어치가 있단 말인가.

허탈했다.

소련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나는 당시 운동권쪽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나에게 "이제부터는 사회참여적인 작품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 며 충고한 사람도 있었다.

그때 나는 소련 여성들이 그토록 바르고 싶어하던 립스틱이 생각났다.

소련은 립스틱 생산이 안되는 나라였는 데도 소련의 여성들은 기를 쓰고 그걸 바르고 싶어했고, 어디서 구했는지 바르고 다녔다.

바로 이처럼 립스틱을 바르고 싶어 하는 쪽이 존중되는 사회, 그런 나라가 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글= 임권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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