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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중국 60년 <6> 인치에서 법치로의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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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法 <법률 법> 중국은 인치(人治)의 전통이 강한 나라다. 신(新) 중국 설립 이후에도 ‘법(法)’은 인치의 그늘에 가려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공산당이 종종 황제로 비유되는 이유다. 그런 중국이 이제 법치사회 구현을 외치고 있다. 2015년까지는 법치정부를 달성하겠다는 야심이다. 배경엔 공산당의 말 한마디로 국가를 통치하던 시대는 지나갔다는 고민이 깔려 있다. 그러나 공산당과 헌법이 동급의 권위를 갖는 상황에서 법치정부 수립은 자칫 구호로 끝날 공산이 크다. 중국은 과연 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의법치국(依法治國)’의 꿈을 실현할 수 있을까.

베이징 하이덴(海淀)구 우다커우(五道口) 사거리에서 접촉사고를 낸 운전자가 공안에게 사고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1997년 ‘법에 의거한 통치’를 새로운 통치 방침으로 확정한 중국은 2015년까지 법치정부를 실현하겠다는 계획이다. [베이징=김경빈 기자]

지난 8월 찾은 중국 남부의 선전시는 활력이 넘쳤다. 2011년 유니버시아드대회 개최를 위한 지하철 확장과 대형 건축물 신축이 한창이었다. 생동감은 공사판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선전은 3년 내 법치정부를 실현할 계획입니다. 국무원이 2015년까지 달성하라고 설정한 목표를 3년 정도 앞당겨 이루는 것이지요. 이를 통해 선전 정부는 전국 최초의 서비스형 정부로 변신할 것입니다.”

왕청이(王成義) 선전시 법제연구소 부소장의 말에는 자신감이 배어났다. 그동안 선전은 경제특구로만 알려져 왔지만, 1993년에 법치 실험지역(試點)으로도 선정된 법치 시범구이기도 하다. 사실 법치정부 실현은 선전만의 일은 아니다. 중국 전체의 일이다. 또 어제 오늘의 일만도 아니다. 중국공산당은 97년 제15차 당대회 때 ‘법에 의거한 통치(依法治國)’를 새로운 통치 방침으로 채택했다. 2004년엔 국무원이 법치정부 실현을 구체적으로 정리한 ‘실시요강’을 발표해 지방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도록 했다. 여기엔 정부직능 전환과 행정관리체제 개혁 등을 통해 2015년까지 법치정부를 달성한다는 추진 방안이 담겨 있다.

중국이 법치정부 실현에 안간힘을 쓰는 이유는 무얼까. 한마디로 공산당 정책이나 정부의 지시를 통해 국가를 통치하던 시대는 지나갔다는 고민이 깔려 있다. 중국은 현재 세계 3위의 교역국이라는 사실이 말해주듯이 세계 경제에 깊숙이 편입돼 있다. 국내적으로도 90년대 중반 이후 시장경제 중심의 ‘중국 특색의 자본주의’가 정착됐다. 법률 체제의 수립과 집행 없이는 대외무역 관리, 기업의 경제 활동 규제가 불가능한 상황이 된 것이다. ‘시장경제는 법치 경제’라는 슬로건이 10여 년 전부터 중국에서 크게 유행한 것은 이 때문이다. 또 지방정부와 당정 간부의 도를 넘은 각종 ‘약탈 행위’도 법치정부 추진을 자극했다. 농민 토지의 자의적 수용과 개발, 각종 사업 인·허가권의 남용과 금품수수, 자신들이 작성한 문건을 근거로 지방정부와 공무원이 권력을 행사해 부당 이득을 취하는 따위의 행위가 만연한 것이다. 5인 이상이 참여해 공공 치안에 영향을 미칠 정도인 집단소요 사건이 2005년 8만7000건이나 발생한 배경엔 바로 이 같은 지방정부와 당정 간부의 극심한 약탈 행위가 깔려 있다.

현재 선전의 법치정부 실현 노력은 정부 활동의 법적 근거 마련에 우선이 주어지고 있다. 80년대는 ‘위법개혁(違法改革)’의 시대였다. ‘법을 지키면 개혁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개혁은 종종 위법·탈법적으로 이뤄졌다. 헌법이 금지한 토지사용권 임대를 선전 정부가 버젓이 대규모로 감행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지금은 ‘입법선행(立法先行)’의 시대다. 정부가 무슨 일을 하려면 먼저 법규부터 제정해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법치정부 실현이 계획대로 이뤄질 것인가. 말은 쉽지만 실천이 어렵다. 2007년 말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공산당 사업 지상(至上), 인민이익 지상, 헌법·법률 지상’ 원칙을 발표했다. 여기서 공산당과 헌법은 동급의 권위를 갖는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당의 결정사항을 집행하는 정부 행위를 법률로 규제할 수 있을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행정소송법은 공산당의 모든 행위를 국민의 행정소송 대상에서 제외했다.

법치정부 실현을 정부 주도로 추진하는 것도 문제다. 정부는 국가 법률의 80% 이상, 지방 조례의 90% 이상을 집행한다. 그런데 정부 스스로가 자신의 팔과 다리에 족쇄를 채울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다. 법치정부 실현에는 정부의 준법 행정을 강제하고 감독할 수 있는 별도의 세력이 필요하다. 의회와 언론, 시민 사회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모두가 힘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의회의 대정부 감독 기능은 미약하고 언론은 공산당의 ‘입’으로서 정부 비판보다 성과 홍보가 주업무다. 시민 사회는 이제 걸음마 단계다. 또 법치정부 실현엔 사법 독립이 필수적인데 공산당이 사실상 법원 인사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법관은 정치적 중립을 지킬 수 없다. 특히 정치적 사건이 중요하고, 민감한 사회적 사건 등은 공산당 정법위원회가 사전에 심사해 판결 방향을 결정한다.

결국 법치정부는 행정 개혁이나 사법 개혁뿐 아니라 정치 개혁도 함께 추진돼야 실현이 가능한 것이다. 법치정부는 무엇보다 공산당이 아니라 법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 법률지상의 원칙을 요구한다. 이는 공산당 일당체제의 개혁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선전이 비록 법치정부 실현의 조기 달성을 외치지만 계획대로 될지는 미지수다.

조영남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yncho@snu.ac.kr,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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