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이승하 '이 거대한 세기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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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유한 (1) 과 무한 (0) 이 만들어내는

무가치한 존재의 더미

전세계의 사막이 점점 넓어지고 있듯이

묘지가 자리넓혀 지구를 뒤덮고 있다

비석도 없는, 생몰연대도 모르는

주검들, 주검의 산, 산맥

하루에 쓰러지는 건물의 수를 생각한다

하루에 파괴되는 승용차의 수를 생각한다

하루에 생산되는 컴퓨터의 수를 생각한다

하루에 버려지는 신생아의 수를 생각한다

- 이승하 (李昇夏.39) '이 거대한 세기말 병동에서.9' 중

시도 오늘의 세기말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시이기를 포기한 듯이 어디 하나 시적이지 않다. 하지만 김소월부터 너무 먼 곳, 이상으로부터도 먼 여기에 이르러 이 시의 비정한 페이소스는 컴퓨터 네트워크가 마비되는 밤하늘에 한 줄기 트럼펫 소리인지 몰라.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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