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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에 부쳐] 아버지, 우리 아버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한 발 떼고 이런 생각

두 발 떼고 저런 생각

세 발, 네 발… 이저리 헤매다가 밤 깊어

생각 깊어보일 듯 보일 듯 희미히 오시네,

처지다 늘어지다 아예 꺾인 목,

꺼진 들썩이는 어깻죽지, 휘청이는 바짓가랑이,

달아진 신발창 밑에 꼬옥꼬옥 숨겨둔

아버지라는 이름의 외로움을

한 번쯤이라도 힐끔 훔쳐본 적 있나요?

희망은 가난한 자, 방황하는 자의 빵이라고

새끼 둔 소 길마 벗을 날 없다고

지네발에 신발 신기듯 식솔들 돌보노라

가문날 웅덩이물처럼 자꾸만 자꾸만 졸아드는 사람,

실직에 가슴 덜커덩 무너지고

안스런 아내 눈빛에 마음 쓰리고

철없는 자식들 낯빛에 겁나는 사람

한 잔 술값에도 눈치 보는 사람

이 세상 떠멜 양 어깨 빛나던 적 있었지요

날 선 파도 품을 양 요동치던 가슴인 적 있었지요

커서 울아빠처럼 될거야,

커서 울아빠처럼 살거야, 이런 소리 들은 적 있었지요

희망 절망 기쁨 설움

신명 고뇌 취업 실업

멍에처럼 가득 지고 절뚝이는 사람, 달과 별과 함께 걸어

어둠 깊어진 골목, 머뭇거리는 발걸음

초인종 앞에서 떨리는 손, 저 손

아, 저 모습보다 더 캄캄한 어둠 없어요

아, 저 처진, 늘어진, 꺾인 목덜미보다

더 깊은 외로움 없어요

그리하여

아버지여, 아버지여, 아버지여

당신보다 더 찬란한 빛 없어요

당신보다 더 진한 물감 없어요

당신보다 더 소중한 모습 없어요

이 세상 이 세상 이 세상

당신의 빛으로, 물감으로, 모습으로 색칠하세요

우리 우리 우리 우리 아버지 아버지…

[조태일은…]

▶64년 시 '아침선박' 으로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95년 만해문학상 수상

▶시집 '자유가 시인더러' 외

▶현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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