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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래자랑' 장수·인기 비결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6면

'딩동딩동댕' 경쾌한 연속음과 '땡~' 무정한 단발음으로 희비가 엇갈리는 KBS '전국노래자랑' .지난 2일 방영된 충남 서산시 축협농장 현장에서도 합격.탈락을 가르는 실로폰 소리는 어김없이 울렸다.

그러나 출연자와 관객은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저 얼굴 익은 이웃이 나오면 박수를 치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오늘을 기다렸다. 엄마 짱입니다요" 라는 익살맞은 플래카드도 흥을 돋운다.

서민들의 무공해 웃음이 피어나는 '전국노래자랑' .80년 11월 시작해 19년 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방송사 개편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저력이 대단하다. 주간단위 TV프로로는 방송3사 최장수 프로다. 내년 초엔 1천회의 대기록에 도전한다.

신세대들은 거의 볼 것 같지 않은 '구닥다리' 분위기인데…. 하지만 따져보면 여타 프로가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숨겨있다. 장수비결을 분야별로 짚어본다.

◇ 무연출의 미학 = 다른 오락프로와 달리 연출이 거의 끼어 들지 않는다. 출연자들의 즉흥성이 생명이다. 관객과 함께 한바탕 즐겁게 놀아야 생기가 살아난다.

처음엔 전체 흐름을 PD와 협의하는 구성작가도 없다가 84년에야 작가도 생겼다. 그만큼 출연자의 꾸밈없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사회자 송해를 껴안고 키스세례를 퍼붓는 것은 이제 '진부한' 모습. 닭.돼지.송아지 등 가축도 무대에 올라와 축제 분위기를 부추긴다. 예측 불가능의 코미디적 풍경이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 평등의 사회학 = 콘테스트 프로가 아니다. 순위 매기기가 아니다는 뜻. 이전에 있었던 가수선발 프로와 달리 출연자들은 무대에서 모두 동등하다. 빼어난 가창력은 중요하지 않다. 남들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 우선이다.

흥과 가락을 즐기는 우리 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억눌린 끼를 마음껏 발산하는 자리다. 많게는 1천명에서 적게는 수백명이 참여하는 예심에서도 제작진은 이 점을 주문한다. 떨어졌다고 항의하지 말라고….

◇ 격변의 음악학 = 오랜 세월만큼 노래풍도 달라졌다. 초창기 애창곡엔 국악.가요의 차이가 크지 않았으나 요즘엔 국악 소리를 듣기가 '하늘의 별따기' 다. 결국 5년전부턴 국악 반주단이 사라지고 말았다. 특히 타령.민요는 양악반주로도 소화가 가능하나 우리 고유의 판소리는 국악반주가 필수적인데 예심에서도 판소리를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중으로부터 국악이 그만큼 멀어진 증거. 현철의 '사랑은 나비인가봐' , 설운도의 '원점' , 태진아의 '옥경이' , 임주리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 등은 세인에 잊혔다가 이 프로를 통해 부활한 대표적 보기다.

◇ 통합의 정치학 = 신군부 집권 직후인 80년 말에 생겨 국민통합이라는 정치적 의도가 있을 것 같지만 제작진은 우연의 일치라고 못박는다. 언론통폐합 이전에 탄생했다는 것. 하지만 한번 공연에 평균 3만여명이 몰려 주민이 하나가 되는 통합의 효과가 있다.

웬만한 선거유세장보다 규모가 크다. 그래서 87년께부턴 시장.군수도 나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요즘엔 자치단체장들이 명예 심사위원으로도 출연한다. 종종 지역 국회의원도 얼굴을 내밀려고 하지만 절대사절이다.

◇ 성장의 경제학 = 경제가 커진 만큼 무대도 달라졌다. 의상변화가 가장 크다. 무채색 바지와 원색적 치마가 물러나고 연예인 뺨치는 화려한 복장이 자주 등장한다. 출연자의 옷을 보고도 변모한 우리 사회를 읽게 된다. 80년대 후반 이후 애창곡 리듬이 빨라진 것도 같은 배경. 경제가 호전되면서 경쾌한 곡이 자주 불렸다.

특산품 소개도 지역경제 활성화에 일조. 출연자마다 거의 빠지지 않는 플래카드도 초창기엔 흔치 않은 광경. 다만 95년께 야외공연장에 의자 2천여개를 설치했다가 97년말 제작비 절감 이유로 다시 철거한 일화는 IMF의 위력을 엿보게 한다.

◇ 개성의 지역학 = 일단 대도시는 가급적 피한다는 것이 원칙. 서민들의 발랄함을 담고 문화 소외지역을 고루 찾아간다는 취지 때문이다. 반면 공연 통계를 보면 영.호남에 40% 가량 몰려있다.

90년부터 구성작가를 맡은 정한욱씨는 "남쪽으로 갈수록, 그리고 물산이 풍부한 해안으로 갈수록 여흥의 분위기가 배가되는 느낌" 이라고 조심스럽게 진단한다. 충청.강원은 자기표현에 상대적으로 익숙하지 않다고. 우열을 가릴 순 없지만 지역마다 독특한 색깔이 묻어난다는 것.

박성명 책임PD는 "갈수록 퇴조하는 지역별 향토색을 발굴해 전통계승에 주력하겠다" 고 다짐한다. 지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이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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