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규제개혁 아직 멀었다] 시리즈 끝내고 취재기자 방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본지 4월 26일자부터 5월 2일자까지 6회에 걸쳐 게재한 '규제개혁 아직 멀었다' 시리즈는 개혁 시동 1년을 맞아 그 진척상황을 생생한 사례 중심으로 점검해보자는 취지에서 기획한 것이었다.

취재기자들의 방담을 통해 뒷얘기와 각계 반응.근본적 문제점 등을 정리한다.

박의준. 하지윤. 왕희수. 박장희. 나현철. 고정애 기자 = 기획취재팀

- 이번 기획은 규제개혁에 대한 중간평가를 목표로 한 것이었죠. 개혁 체감지수가 왜 낮은가, 눈길을 돌려야 할 새로운 방향은 없는가 등을 함께 생각하자는 의미도 있었고요.

- "잘하고 있는 데 무슨 소리냐" 는 공무원들의 반발도 있었지만, 취재 결과 "역시 이대론 안된다" 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은 규제개혁 숫자를 들며 "역사적인 일을 했는데도 국민이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는다" 며 홍보 부족을 탓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기사에 낱낱이 나왔듯 규제개혁이 뒤뚱거리는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본질적인 문제가 많았던 거죠.

- 건수 위주의 규제개혁, 공무원의 과다한 재량권, 무소불위의 창구지도 등을 철저하게 현장 중심으로 파고 들어가 고심 끝에 얻은 결론이었습니다.

- 반향이 예상 외로 컸습니다. 특히 일반 시민들의 반응이 대단했습니다.

지난달 26일 시리즈가 시작되자 취재팀에는 독자의 제보와 격려가 빗발쳤습니다. 한 인테리어 사업자는 "서울 강남의 유명 아파트 공사를 하면서 공무원은 물론 아파트 관리인.청소원들까지 몇만원에서 몇십만원까지 쥐어줘야 했다" 고 하소연했습니다.

지난해 병으로 3급 장애인이 됐다는 한 시민은 국민연금공단에 장애연금을 신청하러 갔다가 당한 일을 얘기하며 정부 산하기관도 취재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장애인 판정기준이 기관마다 다르고 온갖 서류를 요구해 불편하다는 얘기였습니다

- 사례로 거론된 기업들도 대부분 "후련하다" 는 반응을 보였죠.

- 청와대와 정부 부처들에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보도된 사례를 일일이 점검하고 본지에 문의까지 하더군요. "도대체 그 많은 사례를 어디서 취재했느냐" 고 묻기도 했습니다. "일선 공무원이 열심히 일하는 것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아 사기가 떨어질까 걱정된다" 고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 비판받으면 자성하기보다 발설자부터 찾으며 책임을 회피하는 일부 공무원들의 행태에 실망했습니다. 소방 법규가 모호해 비리소지가 많다는 지적에 한 소방서 관계자는 "제보자를 알려달라" 고 요구하더군요. 취재원 보호를 이유로 거부하니까 "무책임하고 남자답지 못하다" 는 억지까지 부리더군요. 서류를 접수하면서 자구 수정을 다섯차례나 요구한 식품의약품안전청 공무원의 사례가 나갔을 때 식약청은 '담당자 개인의 문제' 로 축소하려 들기도 했습니다.

- 행정자치부도 비슷했어요. '인감도장 변경 때 본인이 직접 갔는데도 사진을 요구했다' 는 사례가 나가니까 사실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그런 사례가 없다" 고 따져왔습니다.

이 사례는 취재기자가 직접 겪은 일인데도 말이에요.

- 우리가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불분명하고 비합리적인 규제가 낳는 비리의 문제점이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아니라는 점을 공무원들이 인식했으면 합니다.

- 민원창구 공무원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분명히 규제가 없어졌는데도 예전 방식으로 하거나 아리송한 경우는 무조건 안되는 쪽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개혁이 제대로 되려면 현장점검이 철저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한 국회의원 비서관이 말하기를 "규제개혁위도 인터넷을 통한 민원접수는 활발하지만 시민들의 하소연을 전화로 듣는 전담직원은 단 한명이며, 그것도 다른 업무와 겸해 한다" 는 거예요. 현장 확인도 부실하게 될 소지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 제도는 바뀌는데 관행은 안바뀌는 것도 큰 문제였어요. 보이지 않는 창구지도와 '그림자 규제' 는 여전하거든요. 최근 금융감독원을 감사했던 감사원 사람은 "금융당국의 간섭이 지나쳐 은행이 민간기업인지, 정부산하기관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 라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아무 권한도 없이 중기상담실.5대 계열 여신전담팀 등 각종 부서를 설치하도록 지시하고 '금리.수수료를 낮춰라' '만기 연장해주라' 는 등 시시콜콜 간섭한다는 겁니다.

- 감사제도 역시 합리화해야 합니다. 공무원들이 민원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감사를 너무 의식한 탓도 있습니다. 일선 공무원들은 "위에선 합리적 처리를 지시하지만 감사에선 규정에 따라 처리했는지만 본다" 고 항변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리를 걸고 민원인의 입장에서 일을 처리하기란 쉽지 않다는 거지요. 규제개혁을 제대로 하자면 감사 방식도 잘못을 벌주기보다 잘한 일을 치켜주면서 더 효율적인 틀을 제시하는 쪽으로 변해야 합니다

- 진정한 규제완화는 행정절차 간소화만 가지고는 어렵습니다. 규제를 많이 풀었다고는 하지만 핵심.덩어리 규제는 아직 버티고 있습니다. 수도권 집중억제 정책, 교통.환경.인구 문제 등등은 누구도 손 못대는 애물단지가 됐습니다.

- 성역이 너무 많다는 얘기죠. 예를 들어 엄청난 물류비용을 방치하면서 손 못대는 것이 항만자동화입니다. 규제개혁위가 이 문제를 거론했더니 행정경험이 많은 어느 공무원이 "이게 우리가 다룰 문제요?" 라고 반박했다는군요.

- 여론을 수렴해 규제개혁에 앞장서야 할 국회가 오히려 걸림돌 노릇을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특히 덩어리 규제는 정치적 사안이 많아 국회를 통하지 않고는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국회에서는 개혁안을 변질시키는 경우가 많아요. 오죽하면 규제개혁위 사람들이 "국회가 할 일을 우리가 대신 하는 데 딴죽이나 안 걸었으면 좋겠다" 고 비아냥대겠어요.

- 우리 언론도 반성할 부분이 있어요. 큰 사고가 나면 언론은 본질적 문제를 파고들기보다 이런저런 규제를 만들라고 다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전불감증을 경고하는 거야 물론 좋지만 지나친 면이 있었죠. 그러면 공무원들은 "그것 봐라" 면서 마치 사고를 기다렸다는 듯 새 규제를 만듭니다. 그래서 사고 직후 만든 법령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나오는 겁니다.

- 시리즈가 문제점 중심으로 가다 보니 잘 한 부문에 대한 평가가 조금은 인색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규제개혁 담당 사무차장 요한나 셀프도 "규제개혁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가 강하고 민.관 합동기구까지 만든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고 했다지요.

- 그래요. 기업들도 최소한 제도면에서는 규제가 많이 풀렸다고 평가합니다. 외국인과 유통업계도 "70~80%의 규제는 없어진 것 같다" 며 후한 점수를 주더군요.

- 취재 과정에서 공무원들의 처우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선 공무원들은 "구조조정으로 사람은 줄었는데 행정서비스의 질을 높이다보니 사실 힘이 든다" 고 하더군요.

- 개혁의 '무풍지대' 인 사법부와 입법부를 다루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이번 시리즈에 담지 못한 부문은 '규제개혁 신문고' 를 운영하면서 다룰 것을 독자들께 약속드립니다.

- 마지막으로 규제개혁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한마디 하지요. 규제의 50%를 없앤 건 개혁 '운동가' 의 몫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규제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완성도를 높이는 일은 '전문가' 들이 맡아야 합니다. 또 지금까지는 부처 위주의 숫자 채우기식 개혁이었다면 앞으론 각 부처와 관계법령이 얽혀있는 핵심.덩어리 규제 완화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다행히 정부도 이같은 방향에 대해서는 인식을 같이하고 있더군요. 또한 의식개혁 작업이 병행돼야 하겠지요.

정리 = 나현철.고정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