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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임진강 고랑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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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임진강 두지나루에 가면 ‘황포돛배’가 있다. 일종의 관광선인데 매표소 입구에 전시된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이 화려했던 옛 나루터 고랑포(高浪浦)의 영화를 보여준다. 빽빽하게 들어선 집들 사이로 금융기관과 우시장, 변전소, 우체국, 여관, 그리고 화신백화점이 있었다. 그 사진을 처음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화신백화점이라면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이다. 지금 종로타워 자리에 있던 화신백화점은 한때 화려함의 상징이었다. 이렇게 역사와 전통이 있던 화신백화점의 분점으로 보이는 백화점이 저 황량한 임진강 하구의 고랑포에도 있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고랑포는 그냥 고요했다. 집 한 채 보이지 않았다. 무성한 잡초와 갈대 숲, 백사장이 무심하게 펼쳐져 있었고 모래톱엔 백로들이 한가롭게 앉아있었다. 개성이 지척이라 수많은 물산이 오갔고 그래서 고랑포는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크게 번성했다고 한다.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국밥집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사람들로 왁자지껄한 저잣거리- 한데 그 모든 게 불과 몇십 년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남북이 가로막히면서 개성 길이 끊겼으니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겠지. 이론적으로야 그렇지만 눈으로 보는 풍경은 꿈속인 듯 허망했다. 담벼락 하나, 벽돌 하나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친한 후배와 함께 다시 임진강을 찾아갔다. 북한에서 예고 없이 큰 물을 방류하는 바람에 야영객들이 실종된 사건으로 연일 부산하던 지난주였다. 하늘에선 강을 따라 헬기들이 낮게 날아다니고 강 위엔 수색대를 태운 보트들이 떠다니고 다리 위에선 마스크를 쓴 군인들이 강물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두지나루에 가니 예의 흑백사진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그 곁에 지도가 하나 있어 유심히 살펴보니 휴전선은 어떤 곳에선 임진강 가운데로, 또는 한강 한가운데로 이어진다. 휴전선이 가깝다는 건 알았지만 내가 방금 지나온 자유로가 남방한계선과 맞닿아 있다는 건 정말 몰랐다.

유난히 아름다운 임진강과 한강. 그곳이 맞닿는 곳은 더욱 장관이어서 시야를 가로막는 철책을 원망하며 좀 치워주면 안 되나 툴툴거린 적이 있었다. 한데 지도를 보니 강 가운데는 휴전선이고 강 이쪽은 남방한계선이다. 그 사이는 비무장지대(DMZ)다. 죄라도 지은 양 속이 뜨끔해진다.

다시 찾은 고랑포는 여전히 평화롭고 고요했다. 조수 따라 올라온 갈매기들이 신기하다. 백로들은 도통한 듯 움직이지 않는다. 갈대 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함께 강물은 무심히 흘러가고 남북의 인간사도 덧없이 흘러간다. 고랑포 지척엔 경순왕릉이 있다. 그 망국의 왕이 기구한 사연 끝에 이곳에 묻혀 고랑포의 비감을 더해 준다.

빨간 해가 하늘을 물들이며 임진강 하구 쪽으로 넘어가고 있다. 참으로 우리네 풀뿌리들은 역사 앞에서 아무 할 말이 없는 존재다. 무력하기 짝이 없다. 사라진 고랑포와 화신백화점, 임진강과 한강을 가르는 휴전선, 그리고 실종자를 찾으려고 하늘에 뜬 헬기가 우리 일상과도 피처럼 선명한 연관성을 가진 게 분명하지만 벽에 갇힌 듯 막막해 그냥 하늘을 보고 만다. 분수에 넘치는 일을 생각하면 골치가 아픈 법이다. 막걸리 집을 찾아 나섰다.

박치문 바둑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