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비구니' 논란
나는 83년 '불의 딸' 을 시작으로 이른바 '다작감독' 의 멍에를 확실히 벗어던지게 됐다.
'티켓' 과 '씨받이' 두편을 만든 86년을 제외하면 '한해 한작품' 의 원칙이 지켜졌기 때문이다.
'불의 딸' 은 '신궁' 이후 나의 두번째 무속영화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실패한 영화였다.
영화의 주제로 무속을 끌어들이긴 했지만, 그걸 너무 어설프게 처리했다.
나는 "이 주제는 앞으로 좀더 연구해 보자" 는 과제만을 남기고 기억속에서 접고 말았다.
84년은 내 영화인생의 보기 드문 시련기였다.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는 극장에 올려보지도 못하고 사장됐고, '비구니' 는 타의에 의해 제작 중단되는 가슴 아픈 일이 벌어졌다.
우진필름이 제작한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는 한영수.조용원.윤양하 등이 주연을 맡은 궁중 사극이자 멜로드라마였다.
작품의 성격상 80년대 이후 내가 취해온 장르에서 다소 벗어난 것이기도 하다.
비록 일반에게 공개하지 못하고 사장됐지만 87년 다시 만든 대형사극 '연산일기' 가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해 얼마간 위안이 됐다.
'비구니' 는 불교계의 거센 반발로 제작이 중단됐다.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이 제작자로 변신해 창립 첫 작품으로 계획한 야심작이었다.
문제가 된 부분은 주인공이 입산하기전 행적 때문이었다.
불교계에서는 "아무리 속세의 일이라고 해도 성직자인 비구니를 그런 식으로 묘사할 수 있느냐" 며 엄청난 반발을 보였다.
이는 단번에 '표현의 자유' 문제가 새삼 여론의 도마위에 오르는 상징적인 사건이 됐다.
사실 불교계는 80년대 벽두에 겪은 혹독한 법난으로 울분이 팽배해 있었다.
때마침 나온 영화 '비구니' 가 그 분노의 기름더미위에 불을 붙이는 격이 된 것이다.
심한 몸싸움과 시위가 벌어지는 홍역을 치르고나서 '비구니' 의 제작은 취소되고 말았다.
대규모 군중신과 전쟁장면 등 이미 촬영이 상당부분 진행된 상태였기 때문에 제작자의 경제적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웬만한 작품의 총 제작비라고 할만한 3억원 가까운 돈이 날라가 버렸다.
원래 '비구니' 는 김지미씨가 연기는 물론 제작까지 손대려고 했던 작품이다.
한동안 대전에 칩거하던 김씨가 활동을 재개하면서 이 작품을 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 이사장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의 제작발표회가 있은후 주연배우 김지미씨의 삭발장면이 매스컴으로부터 초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설악산의 한 사찰에서 있은 삭발장면이 MBC9시 뉴스에도 방영될 정도였다.
이쯤해서 나와 작가 송길한씨와의 인연을 잠깐 얘기하고 넘어가야겠다.
이미 말했듯송씨와는 '짝코' 로 처음 만나 수많은 작품에서 호흡을 맞춰왔다.
내 영화인생에서 결코 빼놓을 수없는 동반자다.
나보다 네살 아래인 송씨는 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나리오가 당선돼 데뷔했다.
'짝코' 로 만나기전에 그는 '깃발없는 기수' 를 보고 내게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당시 그는 '시나리오 경시' 풍조에 불만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는 문학대신 영화적인 열정을 불태우면서, 영화계의 잘못된 풍토을 개선하
고 싶어했다.
이를 테면 외적인 흥행여부가 시나리오를 손상한다는 데 주목하고 있었다.
'짝코' 가 그때까지 만들어진 반공영화들과 차별성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송작가의 도움이 컸다.
반공을 좀 더 인간적인 면에서 접근, 분단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문제로 환원해 보자는 시각에서 서로 공감한 것이다.
이런 시각을 문학보다 앞서 영화에서 먼저 다뤘다는 데 대해 나와 송작가는 자부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송작가와의 두번째 작품은 '우상의 눈물' (81년) 이었다.
한 개인이 집단의 논리에 의해 어떻게 스러져 가는가를 다룬 작품이었다.
소재는 10대들의 이야기였지만, 어른들의 사회에 대한 풍자이기도 했다.
불행히도 흥행에는 실패했다.
이후 송작가와는 '만다라' 를 거쳐 '길소뜸' 에서 호흡을 맞춤으로써 본격적인 콤비플레이를 펼치기 시작했다.
글= 임권택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