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00.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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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8장 도둑

"너 어제 밤에 박씨하고 그거 했지?" 이튿날 아침에 있었던 언니의 단도직입적인 추궁이었다. 그러나 희숙은 동요하거나 찔끔하는 기색도 없이 대꾸는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가 조만간 질척하게 진전될 줄 짐작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보니 어쩐 셈인지 퍼먹다가 빼앗긴 어린 날의 밥그릇처럼 섭섭하고 허전했다.

게다가 민망스런 낌새라곤 눈곱만치도 없어 보이는 동기간의 뻔뻔스런 반죽이 눈엣가시처럼 거북해서 비윗장까지 뒤틀렸다. 그러나 저절로 삐죽거리고 나오려는 혓바닥을 애써 입안으로 감추며 비꼬았다.

"식도 안 올리고 그 짓부터 먼저 해야 되겠더라 이거지?" "언니 왜 그래?" "그래. 내가 밥 먼저냐 국 먼저냐 순서 따질 처지는 못되지만, 공연히 긴장돼서 그런다. "

"걱정 말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깐. 돈을 나한테 모두 맡겼단 말야. " "신용담보라던 결혼담보라던?" "담보가 뭐야? 내가 은행 가서 대출받은 줄 알어? 어쨌든 두 가지 다야. " "그래도 식은 언제 올린다는 담보라도 있어야지. 두 사람 모두 미혼인데, 꿀릴 게 뭐가 있어? 니가 경망스러워서 그 사람 들배지기에 해까닥 넘어간 건 아닌지 모르겠다. "

"청첩장 돌릴 사람도 없고, 주례 세울 사람도 없다니까 공연히 눈물나데. 하긴 이래저래 핑계가 많은 걸 보니, 뒤 꿀리는 데가 많은가 싶기도 하지만 의심하지 않기로 했어. " "뒤 꿀리는 것이라면 어디 그 사람뿐이겠니. " 지금까지 부추겨 왔었던 당사자가 갑자기 돌변해서 비틀어 물듯 빈정거리고 있는 것에 희숙도 잔뜩 비윗장이 뒤틀려 숨겨 놓았던 한 마디를 참지 못하고 내뱉고 말았다.

"언니 그런 소리 하지마. 모두들 시치미 잡아떼고 있어서 그렇지 과거 없는 여자들 어디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구 해. 우선 언니부터 형부가 속고 있는 과거가 있잖아. " 그 순간, 뒷덜미까지 벌겋게 상기된 언니는 때마침 식탁 아래로 떨어진 젓가락 한 개를 우연히 발견하고 얼른 집어 들며, 들릴락 말락하게 희숙의 말문을 가로막았다.

"얘. 그만 하자. 입씨름 길게 했다간 우리 집안 케케묵은 구린내까지 몽땅 들춰내겠다. " 미심쩍고 꺼림칙했지만, 동기간인 희숙이가 당돌하게 칼을 뽑아 드는 바람에 더 이상 까탈을 부릴 수 없었다.

설령 그녀가 반격을 시도하지 않았더라도 두 사람의 결합을 격식의 구애 없이 애간장을 끓이며 부추겨 왔던 처지였다는 것은 언니 먼저 잘 알고 있었다.

저질러진 것이 당사자의 입으로도 확인된 것이라면, 격식의 차서를 따져 속 끓일 복잡한 여자가 아니었고, 그 점에 있어선 희숙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름판에 발목이 빠질 대로 빠져 있는 남편보다 박봉환을 구슬리고 다독여 생계 유지하며 잇속도 차려보겠다는 작심도 해롭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도 그들에겐 당연한 귀결이었다.

대접도 그 날 저녁부터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식탁의 가운데 자리는 어느 새 봉환의 차지가 되었고, 봉환이가 먼저 수저를 들기까지 두 여자는 기다렸다. 커피 한 잔이면 충분했던 후식 차례에 과일 접시가 끼어들었다.

"형님은 벌써 이틀째 눈에 안 띄네. " 손씨의 행방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거드름까지 피워 가며 슬쩍 퉁기는 봉환의 이죽거림에 두 여자는 고개까지 숙였다. 안주인은 또다시 얼굴이 벌개지도록 무안을 당하고 말았다.

섰다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남편 손씨를 넉장거리하며 만류하지는 못했을망정 이틀 전에는 남편 등뒤에 쪼그리고 앉아 패를 넘보며 거들기까지 했었다. 그랬던 것은 남편의 섰다병은 선택의 여지조차 없었을 만큼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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