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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은 37년 전 중국을 열었고 그 후손은 중국에 미래를 걸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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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중국어 배우기 열풍이 일고 있다. 10일 미국 버지니아주 마셜 고교 학생들이 오성홍기(중국 국기)를 붙여 놓은 교실에서 중국어 수업에 열중하고 있다. [페어팩스=김태성 기자]

지난 4일 중국 상하이(上海)의 중국유럽국제공상학원(CEIBS) 캠퍼스에서 만난 미국 유학생 데본 A 닉슨(26)은 좀 독특한 인물이다. 그의 큰할아버지가 1972년 ‘죽(竹)의 장막’을 열고 처음으로 중국을 서방에 소개했던 제37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중국에 와서 직접 보고 배우지 않는다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에머리 대학 졸업 후 칠레 명문인 아돌포 이바피에즈 대학에서 MBA를 한 그가 다시 중국으로 날아와 MBA 과정을 밟고 있는 이유다. 유학생 닉슨은 “미국인에게도 중국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지난 학기엔 최고의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았고 2008년에는 입학생 학생회장까지 맡았다. 졸업 후엔 중국에 남아 환경 사업을 해볼 생각이다. 할아버지가 ‘평화’를 얻기 위해 중국의 빗장을 풀었다면 그의 종손자는 기회를 잡기 위해 중국으로 날아온 것이다.

중국의 존재감은 워싱턴에서도 짙게 느껴진다. 10일 오전 워싱턴 서쪽 버지니아주에 위치한 마셜 고교의 한 교실. 중국어 수업이 한창이다. 자식에게 물려줄 최고의 자산은 중국어라는 짐 로저스 로저스홀딩스 회장의 말이 실천되고 있는 현장이다.

“중국어를 꼭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중국이 미국에 버금갈 만한 국가로 급격하게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에 처음 중국어 수업을 신청했다는 코노 디난(고3)의 말이다. 중국어 교사인 레이제(雷潔)는 “6년 전엔 중국어 수강생이 60여 명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세 배 가까운 170여 명으로 늘었다”며 “올해는 중국어 교사를 한 명 더 채용했다”고 소개했다. 미국 초·중·고에서 중국어를 배우는 학생이 2000년 5000여 명에서 지난해에는 5만여 명을 넘어섰다.

미국 정부도 중국어 학습을 적극 장려한다. 국가 안보에 필요한 5대 언어 중 하나로 중국어를 지정하고 중국어 수업을 재정 지원한다. 이 덕분에 중국 내 외국 유학생 비율도 변했다. 중국 교육부가 집계한 외국인 유학생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한국과 일본이 줄곧 1, 2위를 차지해왔다. 그러나 지난해 189개 국가·지역에서 온 유학생 22만 명 가운데 미국 학생이 1만9914명으로, 일본(1만6733명)을 제치고 처음으로 2위로 올라섰다.

미 정계도 예외가 아니다. 우방궈(吳邦國·당 서열 2위)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국회) 상무위원장이 지난 9일 미 의회를 찾았다. 초청자인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이 후진타오(胡錦濤·당 서열 1위) 주석을 ‘독재자’라고 비난하는 등 20년 가까이 반중(反中) 성향을 보여온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변화다.

“미 의회는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가장 강력하게 중국을 규탄해 온 곳이다. 펠로시 의장은 91년 천안문 광장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직접 시위를 벌인 인물이기도 하다”

브루킹스연구소 동북아정책연구센터장인 리처드 부시 3세 박사의 말이다. 정작 펠로시 의장 자신은 “내가 변한 게 아니라 내 직위가 변했기 때문”이라며 태연하게 해명했다. 과거 한 의원으로서의 행동과 현재 하원 의장으로서의 태도는 달라야 한다는 얘기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뉴욕 타임스의 중국 관련 기사는 81년 2123건에서 2000년의 3189건, 그리고 지난해엔 4466건을 기록했다. 미국 시민들은 매일매일 중국과 만나고 있는 셈이다.

미국 사회가 이처럼 중국에 ‘푹 빠진’ 이유는 뭘까. 해답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7월 말 워싱턴에서 열린 제1차 미·중 전략 및 경제대화 개막식에 참석해 “21세기는 미·중 두 나라가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중 관계가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양자 관계라는 미국 정부의 판단이 이 한마디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워싱턴=유상철 기자, 상하이=최형규 특파원 ,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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