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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욱 대기자의 경제 패트롤] ‘노사 선진화법’에 햇빛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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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지난주 우리 노사관계에 중요한 변화가 일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사가 실렸다. 올해 파업을 한 75개 기업 중 협상 타결 후 임금을 보전해준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내용이었다. 파업 기간에는 임금을 주지 않는다는, 이른바 ‘무노동 무임금’이란 당연한 원칙이 자리잡는 데 우리는 20년 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무노동 무임금’을 노동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 명문화한 1997년부터 따져도 13년이다. 법이 버젓이 있는데도 현장에선 격려금이니 보상금이니 하는 명목으로 임금을 메워주는, 우리네 기형적 노사관계의 한 부분이 늦게라도 제자리를 잡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노사관계에서 여전히 풀지 못하고 있는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97년 만들어진 현행 노동법에서는 무노동 무임금 외에도 복수노조 허용과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조항이 들어 있다. 법의 취지로 보나 명분으로 보나, 국제 기준으로 보나 너무나 당연한 조항이다. 하지만 이 당연한 조항들이, 그래서 법에 명문화한 조항들이 햇볕 한 번 쬐지 못한 채 13년을 계속 시행 유예 상태로 남아있는 게 이 나라다. 유예 기간이 올해로 끝남에 따라 별도 조치가 없으면 내년에 발효하게 될 이 조항을 놓고 노사는 다시 갑론을박하기 시작했고 정치권은 눈치만 살피고 있다.

복수노조 문제는 노동계나 기업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입장이 다르다. 하지만 복수노조 금지는 노동자로부터 결사(結社)의 자유를 박탈하는 기본권 침해의 문제이고, 따라서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은 복수노조를 허용토록 규정하고 있다. 또 ILO 기준의 준수는 미국이나 유럽연합(EU)은 물론 다른 주요 국가와의 자유무역협정(FTA)에서 당연히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문제는 사실 논리적으로 보면 사용자가 찬성, 노조는 반대하는 게 맞다. 노조 전임자에 대한 임금을 사용자가 지급할 때 당연히 예상되는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물론 80년대 후반 민주화 열기 속에서 노조가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졌을 때부터 상당 기간 전임자 임금 지급을 용인한 것은 현실적 필요가 있었다. 수십 년 군사정권 시절 노조는 금기시됐고 그에 따라 노조가 자생적 역량을 갖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상당수 대기업 노조는 외려 집행부의 귀족화·비대화를 우려하는 단계다. 초기 노동운동의 순수성을 잃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명분 없는 전임자 임금 지급 문제를 스스로 털어버리는 것이 자성의 첫 단계가 될 수 있다.

13년 미뤘으면 지나치게 충분했다. 이젠, 당연하다며 만든 조항들이 햇빛을 볼 수 있게 해 줘야 한다.

박태욱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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