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미군지위- 북한 요구와 그 대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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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주한미군 철수문제에 대해 북한 당국은 미국과의 협상을 진척시켜 나가기 위해 전술적 차원에서 단계적인 입장변화를 보여왔다.

즉 1954년 주한미군의 즉각적 철수 요구로부터 시작해 평화통일의 선결조건으로 주한미군의 단계적.점진적 철수 (87년) , 남북 군축에 상응하는 비율로의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 (90년) , 통일전까지의 주한미군 주둔 용인, 통일 이후 주한미군의 단계적.점진적 철수 (92년) 요구 등이 그것이다.

특히 북한 당국은 95년 9월 19일부터 1주일 동안 방북한 미국의 북한전문가 셀릭 헤리슨을 통해 "북 (조선) 은 궁극적으로 주한미군이 철수돼야 한다고 보지만,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상 하루 이틀에 이뤄지지 않을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평화체계 (New peace mechanism)' 를 구상하고 있다" 고 전하면서,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하는 대신 현 정전체제를 '새로운 평화체계' 로 전환하기를 바라고 있다" 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새로운 평화체계' 란 먼저 '조.미 상호협의체' 를 구성하고, 이 협의체가 가동되는 시점에서 남북기본합의서에서 합의한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가동시키는 이중구조의 평화 보장안을 뜻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북은 현재 조건에서 조.미평화협정 체결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고 하면서 "평화조약 체결이 조.미관계 정상화의 전제조건은 아니라고 보지만 주한미군사령부 해체는 불가피 하다" 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북한은 우선적으로 '조.미상호안보협의체' 를 구성해 주한미군의 역할과 지위를 변화시키는 것을 제1의 대미 군사적 접근 목표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주한미군의 지위.역할 변화와 관련해 재미 친북학자로 알려진 한호석은 미국은 북한을 겨냥한 공격의지를 내포한 모든 군사훈련.군비증강을 포기함으로써 주한미군의 주둔 목적을 탈냉전적 전략변화에 맞게 변경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미국은 '개입 - 확장전략' 에 기초해 한.미상호기본조약의 기본 성격을 새로운 내용으로 수정하여 그 조약을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미.일상호방위조약과 함께 '포괄적인 안보 (comprehensive security)' 를 추구하는 법적 장치의 일부로 바꿀 수 있을 것이며, 주한미군의 역내 (域內) 의 포괄적 안보를 유지하기 위한 무력으로 그 존재방식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주한미군의 역할과 지위변화에 대한 북한의 요구는 유엔사령부 해체는 말할 것도 없고 북한을 주적 (主敵) 으로 상정하고 있는 한.미군사동맹, 일체의 한.미군사훈련 및 작전, 군비증강 등을 포기하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약화되거나 변화되는 징후를 보이고 있지 않는 현 상황에서 이러한 내용을 의미하는 북한의 주한미군 역할과 지위변화 요구는 우리의 안보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 지금까지 불안하나마 한반도의 평화적 균형을 유지해온 가장 핵심적 요소는 주한미군의 존재다.

주한미군 또는 유사시 미국의 전면 군사적 개입 가능성만 없다면 언제라도 북한이 남침전쟁을 감행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지적은 거의 상식에 속하는 것이다.

전 북한 노동당 비서 황장엽 (黃長燁) 씨도 미군의 철수는 곧 남침전쟁으로 이어진다고 봐도 잘못된 판단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주한미군의 지위와 역할 변화를 요구하는 북한의 의도가 북한을 적으로 상정하고 추진되는 일체의 한.미연합군사활동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미군철수 요구와 다름없는 중요한 안보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의 미군 지위와 역할 변화 요구를 지나치게 수세적 또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한반도의 냉전구조를 해체해 남북한간 평화공존을 달성하기 위해 언젠가는 주한미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북한이 우리의 포용정책에 힘입어 대남 적대정책을 완화하고 남북한의 정치.군사적 신뢰구축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해온다면 북을 주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주한미군의 역할과 지위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논의할 수 있다는 전향적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4자회담에서 주한미군의 지위변경 문제를 의제로 올리는 것을 완강히 거부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이러한 의제를 매개로 남북한의 군사적 신뢰구축을 위한 협상을 활성화해 남북한 당국간의 정치.군사대화로 연결시켜 나가는 방안도 고려해 볼 만하다.

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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