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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하나쯤은 간직한 ‘상처’ 잊을 수도 견딜 수도 없다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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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펴낸 작가 김연수씨. [연합뉴스]

젖은 몸이 사랑스러웠던 젊은 애인이 세상을 떠난 지 13년. 그를 사랑하던 당시 내 몸의 세포는 싹 물갈이 돼 단 한 톨도 남아 있지 않고 나는 오십대 후반의 청승맞은 아줌마로 늙어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그 사람이 잊혀지지 않는다면? 불치병으로 사망한 엄마가 겪었을 끔찍한 고통보다도 그 고통을 함께 할 수 없었다는 절망감이 상처로 남아 여전히 들쑤신다면? 아이를 잃은 상실감을 아내가 외간남자, 그것도 한국말이 서툰 인도인에게 털어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면?

소설가 김연수(39)씨가 4년 만에 펴낸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문학동네)는 하나같이 상처 입거나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사랑하던 이들을 진작에 우주 저편으로 떠나보내고도 그들과 함께 했던 기억들 때문에 지금 고통받는다. 고통스런 기억 만큼이나 절망적인 건 그런 고통을 누군가와 나눌 수도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소설집은 절절한 사연들이되 신파조로 쥐어짜거나 ‘소설처럼’ 극적인 반전을 통해 함부로 상처의 치유를 말하지 않는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신형철 평론가가 해설 제목으로 삼은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발언처럼, 주인공들이 상처를 물끄러미 응시하거나 묵묵히 견뎌내는 과정을 담담히 전할 뿐이다.

‘상처를 견디는 방법’이라는 낯익은 소재지만 김씨가 이를 풀어내는 방식은 능수능란하다. 왜 이 소설가가 최근 몇 년 간 황순원·이상 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을 휩쓸고 시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성적표를 받아들 수 있었는지 납득하게 된다. 독자의 호기심을 놓아주지 않는 치밀한 이야기 구조, 인간 내면에 대한 성찰, 백과사전적 지식 등이 돋보인다.

작가도 작품집이 만족스러운 듯 했다. 9일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2007년 무렵부터 소설 쓰기 방식에 변화가 왔는데 그런 작품들이 서너 편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그전까지는 ‘구체적으로 뭘 써야겠다’는 생각에 따라 소설을 썼는데 최근 작품은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발생한 편이라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김씨 개인의 이야기가 바닥 나 바깥 세상으로 눈 돌렸다는 점, 타인과의 소통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데서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바뀐 점 등 몇몇 요인이 작용한 결과다. 김씨는 “요즘은 단편 한 편을 한 열흘간 집중해 쓰다 보면 ‘아, 좋다’는 쾌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2007년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달로 간 코미디언’도 만날 수 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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