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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프런트] 기억하시죠 최요삼, 6명에 새 삶 주고 떠난 ‘진짜 챔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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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축하합니다. 왕자님이네요.” 하지만 의사의 목소리는 떨렸다. 분만실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이옥진(35·여)씨는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자신이 낳은 아기를 보고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아기의 눈동자는 흐릿한 회색 빛이었다. 요한이로 이름 붙인 이 아이는 선천성 백내장과 각막 혼탁 진단을 받았다. 갓 태어난 아들은 중환자실로 보내졌다. 이씨는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유일한 방법은 각막 이식을 받는 것. 서울 아산병원에 각막 이식 대기자로 신청했다. 매일 새벽기도를 하며 애태운 지 열 달쯤 지난 2008년 1월 초. 이씨는 같은 병원에서 복싱선수 최요삼(사진)씨가 뇌사 판정을 받았다는 뉴스를 봤다. WBC 플라이급 세계챔피언이었던 그는 2007년 12월 25일 열린 시합에서 판정승을 거둔 뒤 뇌진탕으로 쓰러졌었다. 뉴스가 끝난 뒤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각막 수술이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이씨는 “각막이 얼마 전에 사망한 최요삼 선수의 것인 줄 알게 됐다”며 “우리 가족에게 희망이 생겼다”고 말했다.

34세로 숨진 최 선수는 생전에 장기기증 등록을 한 적이 없다. 그의 장기를 기증하기로 결정한 건 어머니 오순이(66)씨와 10년 넘게 그의 매니저였던 동생 최경호(33)씨 등 가족이었다. 순천향병원에 이어 아산병원에서도 뇌사 판정을 내리자 경호씨는 어떻게 하면 형을 잘 보내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때 생각난 게 최 선수가 일기장에 남긴 ‘영웅처럼 멋있게 살고 싶다’라는 구절이었다. 그는 “형이 단지 복싱 영웅만이 아닌 진정한 영웅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길 바랐다”며 “평소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싶다’고 말했던 형에게 어울리는 일”이라고 전했다.

최 선수의 장기는 모두 6명에게 새 삶을 선사했다. 그의 심장은 8년 동안 심부전증을 앓고 있던 30대 중반의 여성에게, 간은 급성간염에 걸려 한두 달 내에 이식을 받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었던 60대 여성에게 전달됐다. 두 개의 신장은 각각 10대와 30대 남성에게 이식됐다. 각막 두 개는 70대 남성과 요한(2)이에게 전해져 새 빛을 볼 수 있게 해 줬다. 경호씨는 “형은 떠났지만 요한이를 통해 세상을 보고 있는 것 같아 설렌다”며 “이후 우리 가족 모두가 장기기증 등록을 했다”고 말했다.

9일은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가 정한 ‘장기기증의 날’이다. 한 사람이 기증할 수 있는 장기가 최대 9가지(신장·간장·췌장·심장·폐·췌도·소장 등 고형 장기와 골수·각막 등 조직)라는 점과 생명을 ‘구한다’는 의미가 있다. 지난달 현재 우리나라의 장기이식 대기자는 모두 1만6000여 명. 하지만 매년 장기기증을 하는 사람은 2000여 명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특히 가장 많은 장기를 나눌 수 있는 뇌사자의 경우, 100만 명당 3명만이 장기 이식을 하고 있다. 본부는 현행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 개정을 통해 장기기증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정하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이를 위해 홈페이지(www.donor.or.kr)를 통해 대국민 서명작업을 벌이고 있다.


김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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