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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원수 갚기 위해 스스로 자객이 된 여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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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1935년 저격 사건 뒤 7년 형을 받고 톈진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스구란. 김명호 제공

1925년 가을 안후이(安徽)·장쑤(江蘇)·저장(浙江)성 등을 장악한 대(大)군벌 쑨촨팡(孫傳芳)은 동북 군벌 장쭤린(張作霖)에게 불만을 품은 군벌들과 연합하는 데 성공했다. 두 세력은 안후이성 쟁탈을 위해 일전을 벌였다. 동북 계열인 장쭝창(張宗昌)은 쑨에게 대항할 인물로 스충빈(施從濱)을 선택하며 안후이성 도독을 보장했다.

안후이는 스충빈의 고향이었다. 서른 살 생일날 돼지머리 하나를 구입해 잔치를 하려던 중 빚쟁이가 달려와 돼지머리를 들고 가는 바람에 망신을 당했던 스는 기대에 부풀었다. 딸 구란(谷蘭)에게 “금의환향이 멀지 않았다. 돼지 990마리를 잡아 잔치를 하겠다”며 큰소리를 쳤다. 스는 백계 러시아인으로 구성된 용병과 장갑차까지 동원했지만 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포로가 된 스충빈은 쑨촨팡 앞에 끌려왔다. 쑨은 포로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주위의 권고를 무시했다. 인자한 웃음을 짓더니 큰 칼로 스의 목을 쳤다. “신임 안후이성 도독 스충빈”이라고 쓴 깃발과 함께 3일간 역 앞에 효수(梟首)했다.

소식을 들은 구란은 복수를 결심했다. 모친을 데리고 장쭝창을 찾아갔다. 가족의 생활비와 오빠를 단장으로 발탁할 것과 동생들의 일본 유학 비용을 요구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란은 이렇게 해 놓으면 오빠가 부친의 원수를 갚아 주리라고 굳게 믿었다. 20세 때였다. 장은 약속을 지켰다. 동생에 비하면 한참 빠지는 놈이라며 혀를 찼지만 옌타이 경비사령관에 중용했다. 구란은 “우리 집안은 네 덕에 셈이 폈다. 인간이란 용서도 할 줄 알아야 한다. 복수 얘기는 입에 올리지도 마라”는 오빠의 편지를 받자 남매 관계를 단절했다. 평소에 좀 모자란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건 그 이상이었다.

말년의 스구란과 두 아들. 앞줄 왼쪽은 며느리.

두 번째 희망은 남편이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주겠다고 하는 바람에 결혼을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엉뚱한 소리만 해댔다. 7년이 흘러도 감감 무소식이자 두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구란은 톈진에 거처를 정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쑨촨팡도 북벌군에 패한 후 하야를 선포하고 톈진에 와 있었다. 구란은 직접 원수를 갚을 계획을 세웠다.

톈진은 작은 도시가 아니었다. 쑨이 어느 구석에 박혀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얼굴도 몰랐다. 9월 17일 부친의 10주기, 구란은 절에 찾아가 영전에 향을 들고 통곡했다. 주지가 다가왔다. “부처님을 섬겨라. 쑨촨팡 같은 명인도 불교 신자가 되었다.”

당시 쑨촨팡은 머리가 복잡했다. 화북을 점령한 일본군과 난징의 국민정부는 쑨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안달이었다. 두문불출하던 쑨은 불교에 귀의했다. 교외에 쥐스린(居士林)이라는 선방을 구입해 불당을 신설했다. 쥐스린에 출근하다시피 한 구란은 쑨의 행적을 유심히 관찰했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빠짐없이 나타났고 앉는 자리도 일정했다.

구란은 헐렁한 옷을 맞췄다. 권총을 안전하게 넣을 수 있는 주머니를 만들고 언론기관에 보낼 사진과 성명서도 작성했다.

1935년 11월 13일 전 5성 연합군사령관 쑨촨팡은 가사를 입고 염불에 열중하던 중 3발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대도시마다 거리에 호외가 굴러다녔다. 법정에 선 구란은 당당했다. “부친은 군인이었다. 전사했다면 쑨을 원수로 여길 이유가 없다. 아버지는 포로였지만 목이 잘리고 시신도 모욕을 당했다. 나는 쑨과 같은 하늘 아래에 살 수가 없었다.”

사회단체, 특히 여성계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구명운동이 벌어졌다. 구란은 7년 형을 선고 받았다. 1년 후 국민정부는 구란의 사면을 발표했다. 여성단체가 워낙 극성을 떠는 바람에 견뎌낼 도리가 없었다. 쑨촨팡의 부인 27명이 유산을 놓고 난투극을 벌인 것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중국 역사에는 자객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곤 한다. 고지식하고 어딘가 좀 미련해 보이는 구석이 있으면서 의협심을 갖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거의가 입으로 온갖 기개를 뽐내다가 막다른 골목에 몰려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람들을 용케도 찾아내 사지에 몰아넣고 목적을 달성한 고용인들이야말로 탁월한 혜안의 소유자들이었다.

스구란은 종래의 자객들과는 경우가 달랐다. 누구에게도 고용당하지 않고 직접 나서서 목적을 달성한 중국 역사상 최후의 정통파 자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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