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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대하는 이중 시선, 우린 문명인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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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국경의 의미가 점차 축소되는 시대다. 문화·인종·성별의 차이에 대한 논의가 학계의 핫 이슈다. 과연 ‘우리’와 ‘타자’의 공존과 상생은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4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차이의 문화 정치학’ 심포지엄에서 호미 바바 하버드대 교수가 강연하고 있다. [김도훈 인턴기자]

“40여 년 뒤면 한국 인구의 10명 중 1명은 외국인.” 3일 국토연구원이 낸 보고서 내용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결혼이주여성은 지난해 12만8000여 명으로 집계됐다. 급속도로 ‘다문화’ 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타자(他者)’에 대한 관심은 이제 철학적 사유를 넘어 일상의 문제로 떠올랐다.

흔히 다문화 현상을 세계화의 성과나 국력신장의 결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예컨대 ‘우리’ 주변의 ‘외국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데니즌(denizen)과 마지즌(margizen)이다. ‘데니즌’의 사전적 의미는 ‘귀화인’을 뜻하지만, 문화정치학에서는 고소득 전문직의 외국인을 가리킨다. 한국에서는 영어를 구사하고 금융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서양계 외국인이겠다.

반면 ‘마지즌’은 빈곤 탈출을 위해 다른 나라로 이주한 주변인이다. 한국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나 결혼 이민자 등으로 대표된다. 데니즌과 마지즌은 우리 사회의 동일한 ‘타자’이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이중적이다. 타자는 단순히 ‘이방인’으로 규정되는 게 아니다. 경제적·성적 차별, 그리고 내면화된 제국주의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이화여대 탈경계인문학연구단은 ‘타자의 문화 정치학’을 주제로 4일 이화여대 LG컨벤션홀에서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타자와 소통하고 공존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논의해보자는 취지다. 이번 학술대회엔 탈식민주의 문화이론의 세계적 대가인 호미 바바 하버드대 교수가 기조 강연을 해 관심을 모았다. 그는 국제교류재단과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교육이해연구원의 초청으로 처음 방한했다. 이틀 일정으로 계속되는 심포지엄의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전 지구적 기억에 대해=호미 바바 교수는 ‘전지구적 기억에 대하여’라는 강연에서 집필 중인 저서의 일부를 소개했다. 그는 9·11 테러 이후 “정치·안보 문제가 다른 문화를 응시하는 기준이 되고, 타국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테러와의 전쟁’에서 보듯 자기와 다른 문명을, 즉 타자의 문화를 ‘야만’이라고 쉽게 규정할 수 있을까. 그는 “어떤 문명이든 치명적인 위험은 더 이상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는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하며 “글로벌 시대의 전 지구적 시스템에서 (나와 구분되는) ‘외부’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전 지구가 한 가족”이라는 식으로 주체와 타자, 혹은 문명과 야만 사이의 손쉬운 화해도 가능하지 않다. 그는 “문명과 야만 사이에 있는 유사성과 타자성을 동시에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 안에 있는 야만성이 더 인지하기 어렵고 더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적 타자로서의 이주여성=“정조 관념이 투철하고 일부종사를 철칙으로 한다.” “출산 후에도 몸매의 변화가 거의 없는 것이 특징.” 국내 국제결혼중개회사의 홈페이지가 소개하고 있는 국적별 여성 ‘품평’이다. 이수안 이화인문과학원 HK사업단 젠더분과장은 ‘성적 타자로서의 결혼이주여성 이미지’란 논문에서 결혼이주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을 소개했다. ‘성적·인종적 타자’인 이들을 통해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재확립되는 셈이다. 또 “외모적으로 한국여성과 구별하기 힘들다”는 식의 소개는 여전히 피부색에 근거한 차별 속에서 한국적 ‘다문화’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재일 한국인, 월경 못하는 타자=5일 기조강연을 하는 재일학자 서경식 도쿄 게이자이대 교수는 ‘자이니치(在日·재일조선인이 대부분인 ‘정주 외국인’의 약칭)’의 존재를 통해 타자에 대한 차별이 어떻게 ‘주체’를 구성하는지를 따진다. 일본인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자이니치’에 부여함으로써 스스로의 ‘선한’ 이미지를 만들어 왔다.

서 교수는 ‘자이니치’라는 축약어에 주목한다. 일본에 살고 있지만 ‘누구인가’가 생략된 표현이다. ‘자이니치’란 규정 속에서 재일 조선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돼 버렸다. 일본인은 ‘조센진’이란 말 속에 담긴 야만적 식민지배의 역사성을 회피하고 싶어한다. 서 교수는 “자이니치는 전세계에 편재한다”는 말로 타자에 대한 차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배노필 기자 , 사진=김도훈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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