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올림픽의 두려운 병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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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전세계에 중계된 2004 아테네 올림픽 개회식과 축하행사는 '108년 만의 귀향'이라는 올림픽 운동의 참된 의미를 다시금 반추하게 해주었다. 아마도 중앙일보를 통해 처음 접한'108년 만의 귀향'이란 표현은 독자들에게 대단한 낭만을 맛보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체육학자에게 이 표현은 올림픽의 횃불이 '영원한 나그네'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새로운 함의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즉 나그네의 귀향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준비이며 귀향 역시 출발의 일부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고등한 이념과 종교 철학은 그 보편성으로 인해 영속성을 확보한다. 보편성은 얕은 의미에서 볼 때 상식을, 깊은 의미에선 차별 없는 적용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2002년 세계를 흥분시킨 월드컵에서 보았듯이 세계언어로서의 스포츠는 그 보편성에 있어 차별적 우월함을 과시한다. 이 보편성은 올림피아에서 치러진 저 고대의 올림픽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같은 언어로 인류에 거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바로 평등과 박애, 평화와 우정이다.

고대 그리스의 강역은 광대했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정복사업이 있기 훨씬 전부터 그리스인은 해상을 통해 지중해 전역에 퍼졌다. 그들은 때론 화합했고, 때론 반목했으며, 때론 전쟁도 불사했다. 현실의 삶을 위한 투쟁은 가열했다. 그러나 영혼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그들은 화해했다. 상상해 보라. 대서양의 서쪽으로부터 소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바다를 거슬러 올림피아로, 올림피아로 오직 월계관의 영광을 꿈꾸며 달려갔을 그리스의 강건한 청년들을.

전쟁마저 그치고 올림피아의 스타디온을 달렸다는 고대 올림픽은 현대에도 새로운 버전으로 끝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이제 지중해가 아니라 땅끝에서 땅끝까지 흩어진 선남선녀들이 아테네로 몰려들었다. 경제와 외교를 비롯한 각 분야에서 경쟁하고 반목했던 지구촌의 모든 국가가 올림픽을 통해 정신과 육체의 축전을 벌인다. 아테네 올림픽 역시 미국과 이라크.아프가니스탄 등 비극의 주인공들을 말없이 감싸안고 있다. 남북한의 공동입장은 올림픽이 평화의 제전임을 실감케 해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올림픽의 이념이 완성된 실체인 양 착각한다. 올림픽 정신은 영원히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미국과 이라크는 서로의 깃발을 들고 박수갈채 속에 올림픽 스타디움에 입장했으나 지금 이 순간에도 이라크 어느 곳에선가는 미군과 이라크 반군이 주고받는 총탄이 소낙비처럼 허공을 누비고 있을 것이다. 손을 잡고 입장했으나 남북한은 아직도 서로에게 겨눈 총부리를 돌리지 않았다. 이스라엘에서는 언제 폭탄테러의 굉음이 진동할지 알 수 없다.

올림픽은 올림픽 그 자체로, 경기는 경기의 언어로 즐기라는 표현은 온당할까. 스포츠 역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 비춰보면 '스포츠의 스포츠를 위한 스포츠'라는 스포츠 유미주의의 다짐은 적절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가 '일본인 기테이손'으로 기록됐다는 데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우리가 과연 스포츠 유미주의로부터 자유로운가. 미국은 집요할 정도로 1988년 올림픽 복싱의 진정한 승자는 로이 존스 주니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작금의 올림픽은 상품으로 노예를 주었던 막바지 시대의 올림픽을 연상시킨다.

이런 여러 이유로 인해 나는 우리 국민, 스포츠팬들이 좀더 유연한 자세로 올림픽을 즐겨주길 바란다. 스포츠를 사생결단의 전쟁으로 여긴다면 벌써 올림픽의 정신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더구나 메달 획득 여부, 메달을 땄다면 색깔부터 확인하고 보는 자세는 아름답지 못하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병균은 무관심이다. 무관심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무명 선수들의 일정이라도 따뜻한 관심 속에 스포츠 종목 그 자체로 향유한다면 좀더 색다른 즐거움으로 올림픽을 맛보게 될 것이다.

권윤방 아테네 한국선수단 부단장·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