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카드’에 여권 복잡한 심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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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30일 서울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은 17대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었다. 2년4개월이 흐른 3일 이명박 정부의 총리 후보로 지명받은 그는 차기 대선 도전 여부를 묻는 기자들에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또다시 말했다.

정 후보자는 대선 불출마를 말했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질문이 뒤따른다는 건 그를 차기 대선 주자로 보는 시선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의 등장이 여권에 던지는 물결파도 그만큼 복잡 미묘하다.

청와대 측은 인선 과정에서 차기 대선 구도를 염두에 둔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은 결과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 총리직 수행 과정에서 탄력을 받을 경우 여권 내 차기 구도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이라며 “다만 우리가 그걸 의도했다기보다는 결과론적인 분석”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표가 독주하고 있는 여권 내 차기 대선 구도에 하나의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특히 한나라당 내 친이명박계 인사 중 일부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이 대통령과 가까운 수도권의 한 재선 의원은 “정 후보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며 “여론의 호평을 받을 경우 여권 내부의 선택지가 늘어날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주장했다.

이회창·이홍구·이수성·이해찬·한명숙 전 총리 등 역대 총리들이 대부분 총리직을 끝낸 뒤 대선 후보로 자리매김했다는 사례도 곁들였다.

친이계 인사들은 정 후보자가 범야권의 사람으로 분류돼온 점도 호재로 여긴다. 서울의 한 초선 의원은 “야권의 잠재 경쟁자를 우군화한 데 따른 효과도 만만찮다”고 말했다. 차기의 꿈을 키우면서도 박 전 대표의 그늘에 가려져온 정몽준 최고위원 측의 반응은 더 솔직했다. 정 최고위원은 평소 “화살통에 화살은 많을수록 좋다”며 대세론을 흔들 수 있는 경쟁 구도의 활성화를 희망해 왔다. 그의 한 측근은 “우리로선 대환영”이라고 말했다.

기대감을 나타내는 친이계 인사들과 달리 친박계 인사들은 이 대통령의 선택에 의문을 표하는 방식으로 견제 심리를 드러냈다.

친박계의 한 중진의원은 “박 전 대표의 위상엔 전혀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면서도 “평소 이명박 정부에 대해 불평을 하셨던 분이 총리에 기용된 것은 다소 의아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의원은 “아직 능력이 검증된 건 아니지 않느냐”고 떨떠름해했다.

여권 내에서 차기 구도와 관련해 이런저런 화제를 불러일으킨 것만으로도 이 대통령에게 ‘정운찬 카드’는 매력적이다.

현재의 권력자 입장에서 미래 권력을 꿈꾸는 후보군을 넓혀 놓는 건 집권 후반기까지 국정 장악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보 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의 김영삼 전 대통령이 그랬다. 물론 위험 부담을 지적하는 시각도 있다. ‘차기형 총리’가 대통령과 경쟁 관계를 형성할 경우다.

어쨌든 ‘정운찬 카드’로 인해 여권 내부의 차기 논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

박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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