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한국변호사의 또다른 잘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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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종기 변호사 수임비리 사건을 계기로 전관예우.떡값.전별금 문제 등 법조계의 병폐에 대한 여러 대책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알맹이가 빠져있는 듯한 느낌이다.

바로 변호사의 의뢰인에 대한 성실성 (duty of loyalty) 의 문제다.

국내에서는 이해관계가 서로 대립되는 두 사건을 한 변호사가 동시에 맡아 처리하는 것 (conflict of interest)에 대한 규제가 전무하다시피 하다.

쌍방 대리인이 된다는 것은 변호사와 의뢰인 사이에 비밀이 보장되지 않음을 뜻한다.

한국에 지사를 둔 외국회사들은 이같은 허점에 대해 몹시 우려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어떤 사람이 로펌을 찾아가 사건의뢰를 하더라도, 그 로펌의 여러 변호사 중 한명이라도 그 사람의 이해와 상충되는 사건을 처리한 적이 있다면 이해 당사자들의 서면동의 없이는 사건을 맡을 수 없게 돼 있다.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윤리규정 때문이다.

이를 어기면 변호사 자격 취소사유도 될 수 있다.

수백명이 근무하는 로펌이라도 단 한명의 변호사가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비밀을 알고 있으면 그 로펌의 변호사 전체가 비밀을 아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는 의뢰인이 변호사에게 밝힌 모든 비밀은 절대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고, 변호사가 양쪽의 이해관계를 알고 재판에 임할 경우 재판의 공정성에도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필요한 조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한 기업의 고문 변호사가 그 기업의 주거래 은행 변호사 업무도 함께 맡을 수 있다.

기업이 주거래 은행을 소송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기업이 은행측을 소송하지 못하도록 권유하기도 한다.

양측의 비밀과 정보, 비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기업을 변호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강자의 편에 서서 압력을 행사하는 중계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현실은 궁극적으로 법률시장 개방을 앞두고 우리나라 변호사 업계의 신뢰성에 치명적인 요소로 간주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사소한 일이라도 의뢰인에 대한 성실의 의무가 지켜지지 않으면 변호사를 징계한다.

99년 1월호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회보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 자격이 박탈된 변호사는 1명, 자격정지를 받은 변호사는 18명이다.

매우 심각한 일을 저질러 이런 징계를 받았겠구나 생각되겠지만 한국의 잣대에서 보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예를 들면 기일내에 소장을 법원에 제출하지 못했거나 의뢰인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사건 서류를 돌려주지 않았을 경우, 또 미리 받은 변호사 비용 중 일부를 변호와 관련없는 개인적인 일에 유용하면 윤리강령을 위반한 '죄' 를 범한 것으로 간주돼 처벌을 받는다.

변호사로서 불성실하다는 것이다.

반면 비리를 저질러도 자격박탈은커녕, 자격정지도 당하지 않는 한국 현실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대목이다.

이처럼 우리는 눈에 쉽게 보이지는 않지만 근본적으로 법조계의 존엄성과 신뢰성을 되찾게하고 한편으로는 의뢰인을 보호하는 근본적인 개혁이 병행돼야 법조계가 새롭게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원조 한국IBM 상임법률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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