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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의 북한탐험]28.끝 내금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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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내금강이 있어 외금강이 서슬져 아름다운 곳이고 외금강이 있어 내금강은 그윽히 깊고 빛나는 곳이겠지. 사물이 안과 밖으로 서로 아울러 하나의 품성을 이루는 법인데 금강산의 안과 밖도 또한 그래야겠지.

이제까지 외금강의 밤낮에 몸을 푹 담가 금강산의 정기와 미색 (美色) 을 받아들였다.

나 개인으로는 한 해 전 히말라야 고도 6천5백m에서 온통 공기 희박으로 피폐해진 심신을 조국의 영검스러운 명산에 와서 어느만큼 다지는 복을 누린 것이다.

처음 사정으로는 내금강은 어림없었다.

하지만 그 곳을 갈 수 있는 행운이 비껴가지 않았다.

온정리에서 길고 긴 온정령을 따라 나섰다.

허위허위 만물상 현관인 만상정에서 에돌아 그때부터 온정령에 이르기까지 몇십번을 굽이치는 길이었다.

외금강에서 내금강으로 넘어서는 마루턱인데 그 옆으로 일방통행 만이 가능한 긴 군용도로의 굴이 뚫려 있었다.

그 입구에 전투태세의 초소가 있었다.

나는 그 쯤에서 두고 온 외금강 쪽을 뒤돌아다 보았으나 온통 구름이었다.

외금강이 아니라 운금강 (雲金剛) 이었다.

이제 이런 구름을 탓하지 않기로 했다.

금강산의 진미는 이 구름에도 있는 것이다.

온정령 굴은 으스스하고 혈관주사처럼 지루했다.

"아!" 누구의 입에선지 감탄사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신통한 노릇이었다.

외금강은 북쪽 선창산.오봉산 등과 낙성.신선대.옥녀봉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거기서 비로고대를 지나 비로봉까지, 또 거기서 월출.일출봉과 내무재령.차일.미륵.백마봉으로 다해가는 그 전체에 온통 구름이 넘쳐 노닐고 있는데 한발짝 넘어서자 거기 내금강은 구름 한 점 없는 신생 (新生) 의 날씨였다.

온정령은 사변 때의 흔적인지 '영웅고개' 로 부른다.

거기서부터 펼쳐지는 내금강 일대의 드넓은 풍광과 그 밖의 원경들은 오래 떠돈 자 만이 알 수 있는 별천지와도 같은 푸른 놀이 서린 지상 (至上) 의 아름다움이었다.

그 풍경은 종교보다 앞서 영혼을 치유한다.

하루에 한끼 국물도 혀에 대지 못하는 굶주림이 있는 참극에 대한 연민의 앞쪽에서 그 곳을 찾아가는 사람을 맞이한다.

내금강은 벌써 어머니이고 누님이고 오래 산 아낙에게서 처음 발견하는 낯선 새로움이며 함부로 유인할 수 없는 위엄을 갖춘 고도의 영성 (靈性) 의 예인 그것이기도 했다.

아름답다 하되 아름답다는 표현을 삼가야 할 처지였다.

옛사람들은 금강산 체험을 이런 내금강에서부터 시작했기에 그다지 체신이 좋았던가.

외금강에서는 미쳐야 하고 내금강에서는 제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매혹의 미학 대신 성찰의 미학이었다.

또한 외금강이 뼈의 작품이라면 내금강은 살의 표현이었다.

천만다행인 것은 내외금강 모두 다 여러 나무들이 예부터 잘 살아오거니와 이를테면 아카시아 같은 외래수종이 맥을 못추는 것이었다.

외금강에서도 그 자취가 여실한 양사언은 내금강도 그가 주인이었다.

금강산 안과 밖을 혼자 가지고 놀다가 간 사람이었다.

내금강 첫마을 금강읍을 지나며 시냇물은 넉넉하고 시내 바닥에서는 그 하얀 조약돌들이 하루 내내 뛰놀고 있었다.

고개 하나 넘을 때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살아온 그 곳 돌과 물을 조금씩 닮아갔다.

신선이 사는 곳을 물어가며 가는 곳이라 해서 '문선교 (問仙橋)' 인데 지금은 섣부른 콘크리트 '내강 (內剛) 다리' 로 불리고 있다.

그 다리를 건너 만천교에 이르면 천갈래 만갈래 물이 모여 하나의 여단 (旅團) 을 지어 흐르는데 저 아래에서 신선을 물었으니 이제 신선을 향하는 향선교를 건너야 했다.

내금강이 거기서부터였다.

어쩌면 내금강이 외금강보다 할 말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외금강이 삼엄하다면 내금강은 인자한 처소라 보내는 사연보다 받아들이는 사연이 훨씬 더하기 때문인가.

나는 내금강의 사람이 되자마자 그 사실 여부를 떠나 금강산을 아주 좋아한 옛 사내 이계조 (李啓朝) 를 떠올렸다.

아니, 그는 금강산을 좋아했다기보다 그 자신의 금강산을 좋아했는지 모른다.

금강산에는 유난히 바위에 새긴 이름들이 많다.

동석동 너럭바위에는 두 아들이 어머니의 장수를 빌면서 어머니의 큰 이름과 자신들의 이름을 새긴 것이 있었다.

하지만 이계조의 이름은 무엇인가.

내금강 만폭동 바위에도 그 이름이 새겨져 있고 보덕암 밑 벼랑에도 새겨져 나뭇가지로 가리고 있었다.

이미 나는 외금강 옥류동에서도 그 이름을 보았고 삼일포 호수 건너 몽천암 (夢泉庵) 암벽에도 그 이름이 어김없이 새겨져 있었다.

내금강에 들어와서도 그 이름을 만났을 때 처음에는 반가운 친지라도 만난 듯 했으나 생각을 고쳐 그 이름을 경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름이 다른 이름들과 함께 금강산 경관을 크게 손상시킨 사실도 싸잡아야 했다.

"원 한심한 녀석 같으니라구…. 평생 제 이름 석자만 새기다가 뒈졌구나…. 쯧쯧. " 그런데 이런 욕설을 속으로 퍼붓고 나자 내 머리 속에는 전혀 다른 사연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이름 석자를 이계조 자신이 새기고 돌아다닌 것이 아니라 그를 지극히 애모하던 여인이 있어 이미 저승의 손님이 된 그를 못잊어 그 이름이나마 천하 명산의 도처에 새겨 길이 명복을 비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그녀는 기방생활에서 번 재물도 넉넉한 편이어서 여생을 오로지 한 사내를 추모하는 일로 금강산의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이계조라는 이름으로 하여금 이렇듯 하나의 소설을 구상했는데 이런 구상은 틀림없이 내금강의 오묘하고 넉넉한 여심 (女心)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보덕굴 설화 속의 미인 보덕각시에는 이계조에의 추모와는 반대로 회정이라는 수행자의 여색을 시험하는 관음신앙이 담겨 있다.

이로부터 나는 만폭동.마하연.묘길상, 그리하여 비로고대를 꿈꾸며 수많은 담 (潭) 들의 그 옥색 보배구슬의 물과 그 물의 양쪽으로 둘러선 기암절벽과 갖은 나무들의 성장 (盛裝)에 넋을 잃어야 하리라. 한편 이런 내금강이기에 긴 편지를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긴 편지란 이제까지 쓴 것보다 써야할 것에 대한 마음의 가없는 유전 (流轉) 이 아니겠는가.

금강산은 없는 사람들이 찾아온 곳이자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곳이다.

내금강의 바람소리에 그런 미래가 들어 있다.

글 = 고은 (시인.경기대대학원 교수)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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