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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정서적 허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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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술도 칼로리가 만만치 않고 안주도 칼로리가 높은 음식인데 왜 도리어 공복감이 오는 것일까? 나는 그걸 ‘정서적 허기’라고 생각했다. 미국 학자 로저 굴드가 설명하기를 기분이 좋지 않거나 외로울 때, 후회스러운 기억이 떠오를 때 배가 고프고, 반대로 누군가와 친밀한 감정을 느끼거나 믿음이 생겼을 때는 공복감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몸통 안의 위장 말고 정서와 관련한 ‘유령 위장’이 따로 있다고 한다. 원래 위장이 비었을 때 배고픈 신호가 와야 하는데 이 유령 위장이 가짜 신호를 보내 뇌에서 ‘배가 고프다’고 인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뭔가를 먹게 하는데 몸의 위장은 채워져도 유령 위장은 만족이 안 되니 포만감은 잘 들지 않고 지속적으로 허기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살아가면서 정서적 만족을 얻을 수 없는 상태에 처해 있을 때 꿩 대신 닭이라는 마음으로 뭐라도 입에 넣어 그 허기를 채우려는 부질없는 노력을 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술을 마시면서 떠들고 재미있는 얘기를 나누지만 헤어지고 나면 도리어 외로움과 헛헛한 마음만 차올라 올 때 우리는 공복감을 느끼게 된다. 문제는 정작 고픈 주체는 밥통이 아니라 마음인데도 뇌에서는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보내 음식을 찾게 한다. 그것은 아마도 실제로 외롭다는 감정을 인식하는 게 불편하니 즉물적이고 해결 가능한 문제로 돌려 버리는 방어적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술을 마셔도 배가 고프고, 라면을 먹는다고 해도 잠깐 기분이 좋아질 뿐 궁극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혼자 지내는 여성들이 야식의 유혹에 굴복하게 되는 것도 비슷한 이치다.

현대사회에서 살면서 많은 관계를 맺지만 아주 가깝고 믿을 만하다고, 의지해도 될 만하다고 느낄 수 있는 인연을 만들 확률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서로 적당히 쿨한 거리를 유지하는 좋은 게 좋은 관계만 늘어난다. 관계의 양은 늘지만 헛헛함은 더해지니, 본능적으로 더 많은 만남을 만든다. 그러나 피상적인 만남은 관계의 배고픔만 더할 뿐이다. 아스파탐이 설탕을 흉내 낼 뿐 대신할 수 없듯이. 이런 실체를 모른 채 그냥 배가 고픈 걸로만 아는 술꾼들은 오늘도 귀갓길에 야식을 먹고 배만 불룩 튀어나오는 후유증을 겪고 있다. 정서적 허기의 실체를 알았으니 이제 한밤에 배가 고프면 오랜만에 친구와 전화를 하거나 가족들과 대화를 해 보는 것은 어떨까? 결국 유령 위장이 정서적 포만감을 느껴야 이 허기는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정신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