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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개혁의 깃발과 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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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국은 개발도상국에서 '개혁도상국 (newly restructuring countries.NRCs)' 으로 됐다.

개혁에 성공하면 개혁형 성장으로 선진국이 될 것이고 아시아에서 19세기 말 유일하게 개혁에 성공한 일본과 비슷한 국제적 위상에 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혁에 실패하면 한국의 21세기는 제2의 20세기와 비슷하게 될지도 모른다.

국민의 정부 1년을 맞이해 우리는 개혁의 성공 여부에 낙관도 비관도 유보한 채 그야말로 '생각하는 사람' 이 되지 않을 수 없다.

DJ개혁은 비유컨대 국기게양대에 걸린 국기들이 감겨져 있는 것을 보고 일일이 기어올라가 펴는 것과 같은 인상이다.

바람이 불면 국기가 저절로 펼쳐지고 펄럭일터인데 바람이 일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금융개혁.재벌개혁.노동개혁 등 대부분이 그렇다.

왜 깃발에 바람이 일지 않을까. 개혁세력이 분열돼 충분히 군집 (群集)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까. 혹은 개혁정책이 반 (反) 개혁 내지 비 (非) 개혁 세력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일까. 혹은 깃발 자체에는 문제가 없을까.

진보적 지식인들 간에 DJ노믹스는 미국의 신자유주의의 일환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고, 따라서 아직 지지와 비판을 유보하고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명분은 신자유주의적이지만 행동은 정부개입주의적이라는 개혁방법의 불투명성도 빈번히 지적되고 있다.

말하자면 깃발 자체가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바람을 타기 어려운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 된다.

개혁의 길은 험하고도 멀다.

지금 경기가 다소 호전되고 있다지만, 아직은 시장의 재고조정과정의 순환적 현상이지 개혁의 성과가 성장으로 나타난 결과는 아니다.

아궁이의 불이 온돌방 아랫목에서 윗목으로 따뜻하게 해가는 과정이라기보다 삼한사온의 따뜻한 날씨 정도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무역수지흑자가 증가한 것도 다 아는 바와 같이 수입이 줄었기 때문이고, 금모아 수출한 것 이외에 특별히 수출이 확대된 결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설비투자와 기술개발의 현저한 후퇴로 앞으로 수출경쟁력은 크게 떨어질 전망이다.

거기다가 지금 선진국측에서는 한국의 수출 숨통을 틀어막을 기세가 아닌가. 일본의 수출경기 회복과 미국의 재팬머니 유입을 위해 엔저 (低) 를 유도하는 것을 보면 수출증가의 길은 너무나 험난해 보인다.

선진국은 '언발에 오줌누기' 식으로 돈을 꿔주어 외환위기를 연장시켜 주는 정도의 협조는 해주되 근본적 해결책인 수출의 길은 오히려 막으려는 심산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개혁의 부작용이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고 그것이 역풍이 되고 있지 않은가.

개혁은 완성되기 전에는 과도기적 혼란을 경과하게 마련이다.

환란 (換亂)에 이은 실업란 (亂) , 벌란 (閥亂.재벌반발) , 지란 (地亂.지역대립) , 정란 (政亂) , 검란 (檢亂) , 어란 (漁亂.한일어업협정에 대한 어민들의 반발) , 노란 (勞亂) 과 정부부채 증가위기가 예고되고 있다.

다시 내각제논의가 가져올 혼란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서 우리는 터널 끝의 희미한 불빛도 간과할 수 없지만 개혁의 과도기적 혼란과 함께 개혁의 부작용이 역풍으로 몰아쳐오는 새로운 위기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지금 DJ개혁의 실패를 허용할만한 여유가 없다.

"이스라엘은 단 한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는 메이어 전 이스라엘 총리의 명언이 있지만, 지금 한국이야말로 개혁의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는 우선 개혁의 깃발을 좀 더 '개혁' 해 보다 투명한 비전과 전략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혁의 방향과 방법에 대한 국민적 합의다.

개혁의식의 확산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바람이 돼 깃발을 펄럭이게 해주어야 한다.

아울러 정치적 안정없는 경제개혁의 성공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개혁의 불회귀점 (不回歸點.point of no return) 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영국이 IMF관리위기를 극복하는데 대처 총리의 개혁이 6~7년 걸리지 않았던가.

지금과 같이 야당과 대립하고 공동여당과의 내각제 약속에 물린 상태로 어떻게 정치적 안정을 달성할 수 있겠는가.

'큰 정치' 와 정치적 '빅딜' 이 필요하다.

대통령의 탈당과 거국내각 구성은 모든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고 개혁의 정치적 기반을 한꺼번에 확립하는 길이 된다고 생각한다.

쑨원 (孫文) 의 표현을 빌리면 "개혁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改革尙未成功) 고 하겠지만 현실은 오히려 "개혁은 더욱 어렵다" (改革益難) 고 해야 할 것이다.

'개혁도상국' 의 성공을 위해서는 대통령의 큰 결심과 큰 정치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그것을 촉진시킬 주체는 지식인과 시민이 아닐까.

김영호 경북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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