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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로 본 해방전후 사회상-'격동기 지식인…'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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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한국 현대사 관련 문헌자료가 태부족한 상황에서 현대사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구술 역사 연구가 본격 등장했다.

해방 전후 시기를 치열하게 살았던 세 유형의 지식인으로부터 어렵게 받아낸 현대사 관련 구술이 자료집으로 나왔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현대사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자료집 '격동기 지식인의 세가지 삶의 모습' 이 바로 그것. 이와 함께 지난 86년 9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사회주의 운동가 김철수 선생의 구술 자료도 '지운 김철수' 라는 이름으로 선보였다.

자료집 '격동기 지식인…' 에는 보수와 진보 양극에서 활동한 두 사람과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 한 사람의 구술이 담겼다.

해방 전후 상공부 차관을 지낸 김규민씨, 잡지 '세대' 필화사건으로 유명한 전 부산일보 주필 황용주씨, 그리고 식민지 시대에 사회주의 계열 민족운동을 주도했다가 해방후 남파간첩으로 활동하다 전향, 경찰관으로 활동했던 한승격씨가 그들. 또 김철수 선생은 88년 이후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 사회주의 민족운동가로, 조선공산당 당서기까지 지냈으면서도 남한에 남았던 독특한 인물이다.

이들은 구술을 통해 직접 만났던 남북한 주요인사들에 대한 인상에서부터 일제 식민지시대.해방전후기.한국전쟁기의 사회상까지 낱낱이 털어놓았다.

한국전쟁 당시 전차와 함께 황소가 나다니던 서울시내의 '풍경' 을 실감나게 그려내는가 하면 (김규민) , 5.16을 전후해 박정희 전대통령과 나눈 시국 토론 이야기와 '세대' 필화사건에 얽힌 뒷얘기를 풀어놓기도 (황용주) 한다.

남파간첩에서 전향한 뒤, 간첩 조사관으로 지냈던 속사정을 털어놓는 (한승격) 예사롭지 않은 증언도 많다. 가히 격동의 세월을 지낸 우리 현대사의 생생한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현대사의 경우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재의 역사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현대사의 주역들이 전해주는 증언과 구술은 문헌자료보다 더 결정적인 공헌을 할 때가 많다.

특히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현대사 관련 자료의 상당부분을 잃어버린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자료집 편찬을 주관한 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의 유병용 부장은 "서구 현대역사학계에서는 이미 구술역사가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는 상황" 이라며 "이번에 나온 구술자료집이 현대사 연구의 대안으로 구술자료 연구에 활기를 띠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한다" 고 강조했다.

그동안 우리 현대사에 대한 구술자료 활용은 거의 불가능했다. 관계자들이 증언을 회피하기도 했지만, 좌우대립의 현실에서 생존을 위한 허위증언이나 자화자찬 식의 증언이 많았던 까닭이다.

고령.사망 등으로 현대사 주역들의 구술은 점점 더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제나마 격변기 지식인의 구술 자료집이 편찬된 것은 그래서 값지다고 하겠다.

고규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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