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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일본총선 기획시론 ①

역사를 바꾼 8·30 선거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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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일본의 역사가 바뀌었다. 일본은 비서구 지역에서 가장 먼저 의회정치와 정당정치를 시작한 나라지만 제대로 된 정권교체가 없었다.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난 이번 선거는 일본이 입헌정치를 시작한 이래 가장 큰 변화다.

어느 일본 정치학자는 일본의 특질을 스스로 변화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만고불역론(萬古不易論)’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군국주의에서 민주국가로 탈바꿈했다. 메이지유신은 서양 세력의 식민지화 압력에 대한 반동으로 초래된 것이며, 민주화는 미 군정의 강압에 의한 것이다. 이를 ‘외압론’이라 한다.

1980년대 미국은 일본에 무역역조의 시정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는 쌓여만 가고 개선의 기미가 없었다. 미국 정계를 시작으로 일본 때리기 열풍이 불고, 급기야 미·일 구조협의가 시작됐다. 일본 때리기로 정치적 압력을 가하고, 구조협의를 통해 일본을 미국 제품이 팔릴 수 있는 구조로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그냥 두면 집중호우식 수출 구조가 변하지 않는다는 불역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일본 정치도 마찬가지다. 1955년 자민당 성립 후 사실상 정권교체가 없었다. 여기에는 일본의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 강력한 관료제도 한몫했다. 좋은 의미로 일본 정치의 안정성이라 부르지만 관료 우월주의 또는 정권교체 없는 삼류 민주주의라는 비판과 함께 부패구조를 낳았다. 90년대 이후 자민당은 과반 획득에 실패했고, 일시적으로 정권을 내놓기도 했다. 냉전 종식이라는 국제사회의 변화 압력이 일본 정치에 투영된 결과였다.

이번 선거에서는 외압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일본 국민 ‘스스로’ 변화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예외적이다. 93년 7월 총선에서 자민당이 의석의 과반 확보에 실패, 38년간 계속된 정권을 잠시 내주기도 했지만 여기에는 자민당의 분열이라는 결정적 요인이 있었다. 당시 일본 국민은 정권교체를 체감하지 못했다. 정권은 교체됐지만 자민당은 여전히 제1당으로 건재했고, 군소 정당의 연립정권은 구심점 없는 오합지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또한 정권교체 10개월 만에 자민당은 사회당과의 연립을 통해 정권에 복귀했다. 지금의 민주당 핵심 인사 중에는 당시 자민당 탈당파가 많다. 이는 역설적으로 일본 국민이 민주당을 과거의 군소정당들과는 달리 정권을 담당할 수 있는 정당으로 믿고 선택한 요인이 됐다. 이번 정권교체는 93년의 그것과는 다르다. 자민당의 의석수가 절대적으로 줄었으며, 종래의 자민당을 능가하는 강력한 민주당이 등장했다. 자민당의 정권 복귀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정책 비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역사·사회적 흐름이 그 저류에 있을 것이다. 반공과 성장을 축으로 한 자민당 정권은 냉전과 거품경제의 붕괴로 수명을 다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경제적으로는 수출 의존, 성장 중시의 발전 모델이 한국·중국 등 신흥국의 등장, 환경 및 에너지 절약형 산업이라는 큰 벽에 부닥쳤다.

또 하나는 외교다. 일본은 외교와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 발전에 전념해 고도성장을 실현했다. 외교와 안보는 미국을 따르면 득이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는 국가로서의 자율성을 약화시켜 경제적으로도 미국을 추종하게 만들었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민주당 대표가 글로벌화와 시장주의가 일본의 경제와 사회를 파괴했다고 비판하고, 미국 추종 외교에서 벗어날 것을 표방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8·30 총선을 계기로 정권교체가 가능한 정당 시스템과 국가적 자율성이 확립될 때 기존의 자민당 중심의 일본에 진정한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93년과 같이 단발성 정권교체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

이성환 계명대 교수·일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