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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뉴스 인 뉴스 <34> 국회의원 선거제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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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면

이명박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비생산적인 정치의 뿌리에는 지역주의 정치가 자리 잡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지역주의를 없애길 원한다면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 지역주의를 극복하자고 아무리 말해도 선거제도를 그대로 두는 한 극복할 수 없다. 수술이 필요한 환자를 진통제로만 다스릴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이 나서 한국 정치의 폐해로 지적돼 온 지역주의의 ‘근원적 처방’으로 선거제도 개혁을 제시한 것입니다. 사실 이번 제안 이전에도 정치권에서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선거제도를 중·대선거구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여러 번 제기됐습니다. 현재 우리 국회의원 선거제도에 무슨 문제가 있기에 선거제도를 바꾸자는 것인지, 선거제도를 바꾸는 것이 지역주의 극복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정효식 기자

박정희, 중선거구제로 과반 정당 확보

우리나라의 선거제도는 1948년 제헌국회부터 한 선거구에서 1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로 출발했다. 그러다 73년 9대 총선에서 한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가 도입된다. 이는 여야 간 선거법 협상으로 바뀐 게 아니라 유신을 선포한 박정희 정권이 비상국무회의에서 일방적으로 바꿔버린 것이었다. 선거구마다 2명을 뽑으면 아무래도 돈이나 조직에서 월등한 여당 후보가 한 명씩은 당선될 것이란 계산이었다. 이 노림수는 적중했다. 당시 총선에서 집권 공화당은 지역구 의석의 50%를 확보했다. 또 6대 총선 때부터 도입된 전국구 제도는 정치 안정을 명분으로 지역구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확보한 제1당에 전국구 전체 의석 중 2분의 1~3분의 2를 우선 배분해 인위적으로 과반수 정당을 만드는 장치가 됐다.

그런데 소선거구제를 했던 50~60년대나 중선거구제 시절인 70년대에는 ‘한나라당=영남당’ ‘민주당=호남당’ ‘자유선진당=충청당’과 같은 등식이 성립하는 지역주의는 출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도시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우세하고, 농촌지역에서 여당 후보가 많이 당선되는 ‘여촌야도(與村野都)’가 두드러졌다. 67년 6월의 7대 총선에서 서울 14개 지역구 가운데 13개를 야당인 신민당이 싹쓸이한 반면 경상남도는 15개 지역구 가운데 14개를 여당이던 공화당이 가져갔다.

13대 총선 때부터 지역 할거구도 등장

88년 4월 치러진 13대 총선에선 다시 소선거구제로 회귀한다. 야당 지도자로서 지역적 기반이 확고했던 양김(김영삼·김대중)이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려면 소선거구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여야 4당이 영·호남과 충청에서 지역 할거구도를 형성하면서 지역주의라는 한국 정치의 고질적 병폐가 뿌리내리게 됐다. 여당인 민정당은 당시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의 출신지 대구·경북에서 29개 선거구 전체를 독식했다. 제1야당이 된 평민당 역시 김대중(DJ) 총재의 연고지인 전남·북과 광주 37개 지역구 중 36개를 싹쓸이했고, 제2야당 통일민주당도 김영삼(YS) 총재의 연고지 부산·경남 지역 37개 의석 중 23개를 획득했다. 김종필(JP) 총재의 신민주공화당도 충청권 27개 선거구 중 15개를 가져갔다.

이후 총선마다 지역별 할거구도가 되풀이됐다. 이것이 90년대 들어 선거제도 개혁 주장이 지역주의 극복이란 명분을 업고 등장한 계기가 됐다. 특히 다른 당의 텃밭에서 선거를 치러야 하는 정치인들이 중선거구제로의 전환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선거법 협상은 일방이 이득을 보면 다른 쪽은 그만큼 손해를 봐야 하는 ‘제로섬’ 게임이어서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96년 총선을 앞두고 당시 이기택 총재가 이끌던 민주당이 중·대선거구제를 강력히 주장했다. 여당인 신한국당도 한때 솔깃했지만 호남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던 DJ 진영의 반대로 무산됐다. DJ는 정권을 잡자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영남권 의석 확보를 위해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번엔 연립정권의 한 축인 JP의 충청계가 외면하면서 실패했다.

한나라당이 손해 감수해야 중·대선거구 가능

2005년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중·대선거구제로의 선거법 개정을 조건으로 한나라당에 대연정 카드를 꺼냈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중·대선거구제로 갈 경우 영남권에선 열린우리당이 의석을 얻는 데 유리한 반면 호남에선 한나라당이 한 석도 얻지 못해 불리하다며 거부했다. 선거제도를 바꿔도 ‘반쪽짜리’ 지역주의 극복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 2008년 18대 총선에서 지역구 득표율과 지역별 정당득표율을 환산해 ‘소선거구제→중·대선거구제’ ‘전국구 비례대표제→권역별 비례대표제’ 개편에 대입한 시뮬레이션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광주광역시의 8개 선거구에서 한나라당 후보는 평균 7%가량 득표했다. 광주를 4명 혹은 8명의 중·대선거구로 개편한다 해도 한 석도 얻지 못하는 득표율이다. 한나라당의 정당 득표율은 전국 합산 37.5%지만 광주·전남지역만 보면 6%를 겨우 넘었다. 광주·전남 지역에 권역별 비례대표 10석이 배정된다 해도 한 석도 못 건지게 되는 것이다.

반면 민주당은 부산에서 지역구 당선자(조경태 의원)를 내는 등 전체 출마자의 평균 득표율이 20%였다. 부산지역을 4~5명씩 선출하는 중선거구 4개로 나눌 경우 3~4석의 지역구 의원을 배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민주당의 정당 지지율도 부산·경남에서 10%를 넘겨 권역별로 10석이 배정될 경우 최소 1석 이상의 비례대표 의원을 낼 수 있게 된다. 여당인 한나라당이 ‘손해 보는 양보’를 하지 않는 한 선거제도 개편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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