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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의 북한탐험]26. 신계사에서의 회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그 허물어질 듯한 3층 석탑!

내가 금강산에 온 은밀한 목적의 하나는 무엇보다 신계사를 찾는 일이었다.

그 일이라면 가슴이 더 설레야 했다.

그런데 금강산에 도착한 다음날 바로 그곳으로 가게 될 줄은 몰랐다.

지그시 울음 같은 것이 고이는 심경이었다.

반야 (般若) 를 구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늘 울기만 하는 보살을 상제보살 (喪啼菩薩) 이라 하는데 나도 덩달아 그런 것이 되고 싶었던가.

신계사는 내 정신의 한 유적지다.

은사 효봉 (曉峰) 이 세속을 떠나 30대가 마감되는 늦깎이로 득도 (得道) 한 곳이다.

그는 평양 복심법원 판사였는데 2심 (二審) 의 극형을 선고한 뒤 인간의 생사문제에 파묻혀 방랑길을 헤매다가 금강산에 들어온 것이다.

그는 금강산 호랑이로 알려진 신계사의 석두 (石頭)에게 갔다.

"몇 걸음에 왔는가" 라는 물음에 "이렇게 왔습니다" 고 받아넘기며 방안을 한 바퀴 돌았다.

"제법이로다. 오늘부터 그대는 내 원수로다" 라는 첫 인가 (印可) 를 받았다.

1925년 7월 1일이었다.

그 뒤로 그는 신계사 건너 보운암과 법기암 뒤 토굴 등지에서 '절구통 수좌' 라는 별명으로 1일1식의 용맹정진에 몸을 바쳤다.

토굴의 밥 구멍 하나만 두고 밀폐된 그 안의 추위로 동상에 걸리고 궁둥이가 문드러지는데도 그는 장부 (丈夫) 의 결가부좌를 풀지 않았다.

그는 어린 시절 그 평양 밖의 고향이나 평양고보 시절도 다 잊었다.

서울 종로1가에 있던 경성재판소나 함흥지법.평양고법, 그리고 대동강 푸른 물 위의 주색도 다 잊어버렸다.

그는 출가 이전의 과거를 언제나 전생이라 했다.

그것에의 기억이나 애착을 끊어버리는 전율의 현재 만이 그의 무자 (無字) 였다.

처음 법명은 운봉 (雲峰) 이었다.

그 법명 이전의 전생에는 이찬형 (李燦亨) .5남매 중 하나였다.

그의 장조카에 이기련 (李基鍊) 이 있다.

50년대 한국전란 당시 육군 대령으로 미군 고문을 그의 부대에서 추방한 사건으로 유명하다.

별명 포대령 (砲大領) .군인인데 문인들을 너무 좋아했다.

김팔봉.구상.장덕조.김광섭들이 그와의 술꾼이었다.

이제 금강산의 효봉은 아버지 이병억의 아들이 아니라 조주 (趙州) 의 아들이 되니 조주무 (趙州無) 와 한 몸이었다.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상 거미집에 고기가 차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구름은 서쪽 달은 동쪽임에. 이 오도송에 그의 스승 석두는 화답한다.

봄이 오니 온갖 꽃 누구 위해 피는고 동으로 가며 서쪽으로 가는 이익 몰라보다니 흰 머리의 아들이 검은 머리 아비에게 나아가 두 마리 진흙소가 싸우다 바다에 빠지고 만다네. 이런 광경을 떠올리며 그의 손자이고 그의 제자인 나도 한마디 있어야 했던지 "잘들 노는군, 금강산 버러지들!" 이라 했다.

상관음.중관음.하관음으로 이어지는 관음연봉 아래쪽에 나앉아 솟아오른 문필봉은 그 아래에 질펀한 터를 펼쳐 놓으니 거기에 신계사가 있다.

고대 법흥왕대 창건이라 하고 금강 4대 사찰 중 하나인데 지금은 3층 석탑의 탑신과 여기저기 주춧돌만 남은 폐허였다.

폐허에는 풀이 우거져야 더욱 폐허인가.

나에게는 이 폐허가 어쩔 수 없이 고토 (故土) 였다.

내 은사가 머리를 깎은 곳이고 그러므로 뒷날의 내가 은사에 의지해 10년을 지내는 인연이 있게 되는데 이곳이야말로 그런 인연의 첫걸음이던 것이다.

대웅전 반야보전 (般若寶殿) 의 자리에 섰다.

절의 중심이었다.

한반도 어느 산사도 다 그 산중의 으뜸이 되는 자리에 있다.

명당이라는 뜻은 이익에 앞서 그 경관에 두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절의 중심인 법당이야말로 그 놓인 자리가 경관의 한복판이기도 하다.

그런데 더 빼어난 경치는 정작 법당 안의 불상 자리에서 바라보는 경치 그것이라 한다.

나는 그런 불상 자리 쪽에서 신계사 앞을 내다 보았다.

운무에 비껴선 전망은 어디로 두둥실 떠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효봉!" 이라고 가만히 입을 달싹거렸다.

이런 내 심사를 영락없이 짐작하고 있는 후천 (後川.유홍준 교수의 호) 이 풀더미 속에서 찾아낸 기와조각 두어개와 그릇조각을 건네줬다.

이게 혹시 그분이 마시던 첫잔 조각인지도 모를 일 아니냐는 것이고 이게 그분이 계시던 집 기와조각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신계사는 폐허로서 그곳을 드나들던 구도자를 증거하는지 모른다.

폐허만큼 참된 얼굴이 어디 있는가.

나는 오래된 그 폐허에서 한동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만 가자는 노새도 없건만 왔으니 떠나야 했다.

그곳에서 좀 떨어진 구석에 눈이 갔다.

신계사 산내암자인 미륵암의 미륵선원 건립비였다.

그 비석의 금강산 고승질 (高僧秩)에 임석두라는 이름이 있었다.

내 노사 (老師) 의 이름이었다.

그 때문에 폐허로서의 신계사 일대에서 지난 날 석두와 효봉의 몇 마디 말이 들리는 듯했다.

다음날 비가 퍼부어 어디로 나갈 수 없었다.

한달 30일에 40일 비가 온다는 금강산 속담이 있다.

하지만 나는 김형수 차장과 함께 다시 신계사터를 지나서 신계천을 건넜다.

안내하는 조참사와 엄양이 있어야 우리 행로는 가능한 것이다.

물이 불어나 급류는 더 우렁찼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다리가 놓여있지 않은 그 냇물을 건넜다.

신발을 벗고 바지를 벗어 머리에 이고 비칠비칠 발을 물 밑의 돌에 못박으며 급류에 맞섰다.

그런 냇물을 두번 건너니 거기 풀더미 한쪽에 절터가 있었다.

보운암 터였다.

금강산 개산조 (開山祖) 보운 (普雲) 이 머물러 도를 깨친 암자였고 우리 가문의 개산암 (開山庵) 이 되기도 했다.

둘레의 큰 나무 밑으로 머루덩굴이 수북하고 땅도 무던히 질척거렸다.

거기서 더 올라가자니 거기에도 절터가 숨겨져 있었다.

법기암 자리였다.

그런 풀더미 폐허에서 지난 날의 은사가 공부하던 곳을 뒤늦게 제자가 찾아와 그 시절의 삼엄한 정신을 회상하는 것도 있을 만했다.

회상은 당사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를 잇는 오늘의 의미에도 생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다시 한 고개를 비에 젖은 채 넘어갔다.

거기가 동석동 흔들바위와 40여명이 함께 타고 떠내려가도 되는 너럭바위가 있는 집선봉 밑의 승지 (勝地) 였다.

봄의 산벚꽃 피면 온통 꽃마당이 되는 곳이었다.

글 = 고은 (시인.경기대대학원 교수)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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