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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삼칼럼]개혁의 리트머스 시험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지난 18일 열린 전국 고검장회의는 내내 납덩어리처럼 무겁고 침울한 가운데 불쑥불쑥 격앙된 항변이 튀어나오는 분위기였다고 전한다.

'한 점 의혹이 없는 철저한 수사' 를 한다며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이름이 리스트에 오른 사람까지 무차별적으로 소환, 조사할 수가 있느냐는 게 항변의 골자였다고 한다.

법원 쪽에서 흘러나오는 항변의 내용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 법관의 경우는 20여년의 법관생활 끝에 재산이라곤 32평짜리 아파트가 고작인데 어찌하다 이번 리스트에 오르는 바람에 자칫하면 20여년의 '청렴' 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돼버릴지도 모를 딱하고 억울한 처지에 놓였다는 것이다.

아무리 법조계의 비리에 분노할지라도 이런 항변이나 억울함의 호소에는 주의깊게 귀를 기울이고 옥석을 구분하는 냉정함과 현명함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이번 사건처럼 여론이 격앙되는 사건은 그 처리가 정치적이고 도매금식으로 흘러가기 십상이고 그러다보면 그 뒤안길에는 억울한 희생양이 즐비하게 되는 경험을 우리는 무수히 해 왔다.

만약 우리가 단순히 권력교체만을 이룩한 것이 아니라 민주의식의 발전을 이룩했다고 자부하려면 사회적 사건을 파악하고 처리하는 자세도 전과는 사뭇 달라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법조계가 모든 비리의 책임을 '문제 있는 일부' 에게 돌리고 그 뒤에 몸을 감추려는 것은 떳떳지 못한 일이며 결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될 수 없다.

검사출신인 이종기변호사는 구속되면서 언젠가는 이런 법조비리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다짐하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회한의 편지를 남긴 바 있다.

의정부사건의 판사출신 이순호변호사도 "어찌어찌 하다보니까 여기에까지 이르렀다" 는 소감을 말한 바 있다.

이는 법조계의 비리가 결코 어느 특정 개인의 부도덕이나 탐욕.탈선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서는 여간한 결심 없이는 극복하기 어려운 불합리한 관행과 구조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임을 암시하고 있다.

선배.동료.지연.학연.혈연을 무시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문화가 존재하고 그 문화 속에서 '왕따' 가 되지 않고 성장하려다 보면 어느덧 자신이 바로 부조리한 관행과 구조를 공고히 하는 데 한몫을 하게 되고 만다고 법조인들은 고백하고 있다.

"이 기회에 아예 법조계의 모든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했으면 좋겠다. 이제는 법대로 하지 않고서는 변호사가 먹고 살 수 없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고 한 젊은 변호사는 말했다.

맞는 말이다.

이종기변호사 사건을 아무리 철저히 수사하고 엄정히 처리한들 만약 문제의 뿌리가 어느 특정 개인의 부도덕이나 탈선에 있는 게 아니라 잘못된 관행과 구조에 있는 것이라면 비리는 또 터질 것이다.

관행과 문화는 그대로 둔 채 개개인에게 올바른 길만 걸을 것을 강조하는 것은 법조인들이 성인 (聖人) 이길 기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 정부도 여느 정권과 마찬가지로 개혁을 다짐하며 출범했고 국민들은 적어도 개혁에 관한 한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강한 추진력을 발휘하리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아직까지 이렇다 할 개혁의 성과가 눈에 띄지 않는다.

우선 발등의 불이 경제살리기였던 때문이었을까. 민주국가의 기본 골격인 법을 바로 세우지 못한대서야 아무리 경제가 다소 되살아난다 해도 정치를 잘했다는 평가는 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검찰이 과거와 조금도 다름없이 정치권력에 휘둘리는 인상을 주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금전적 비리문제까지 겹쳤으니 검찰의 권위는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이번에야말로 법조계의 모든 문제를 노출시켜 법조개혁을 이룩해야 한다.

바람직하든 않든 간에 법조계는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두뇌가 결집돼 있는 곳이다.

이런 집단이 개인의 힘으로는 극복에 한계가 있는 이런저런 불합리한 관행과 문화에 휩쓸려 좌절한다는 것은 국가적인 불행이다.

현 정권은 법조개혁에 정권의 명예를 걸어야 한다.

법조개혁의 성패야말로 전체 개혁의 성패를 가늠케 해주는 리트머스시험지다.

그러나 국민들도 한 젊은 변호사의 이런 호소는 귀담아 둘 필요가 있다.

"계속 터져나오는 변호사 수임 비리를 보고 욕하는 시민이라면 법적 분쟁이 생겼을 때 어느 변호사가 갓 퇴직한 사람인지, 어느 변호사가 담당 판.검사와 같은 학교 출신인지를 찾지 말라. 부정과 비리는 공급자만 있어서는 존재할 수 없다. "

유승삼 중앙M&B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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