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노트북을 열며] 덩샤오핑·김대중과 실사구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42면

지난 5월 6일 중국 베이징대학 국제관계학원 대회의실. 남북관계 특강을 위해 휠체어에 의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병색이 짙어 보였다. 강연 도중 그는 연설문의 일부를 중복해 읽을 정도로 기력이 쇠잔해 있었다. 그러나 85세 고령에 병마와 싸우면서도 그는 남북 화해와 교류 확대를 역설해 큰 박수를 받았다. 그날 베이징대 부총장은 “김 대통령이 베이징대학에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글귀를 남겨 소장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실사구시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철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20년의 나이 차이로 김 전 대통령과 덩은 직접 대면하진 못했지만 실사구시란 글귀를 통해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는 대화를 해온 셈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장례식(23일) 하루 전인 22일은 덩 탄생 105주년이었다. 이념과 체제가 다르지만 이웃한 두 나라 정치 지도자의 삶은 여러모로 닮았다. 덩은 문화대혁명 시기를 비롯해 세 번의 탄압과 숙청을 견뎌냈다. 그래서 오뚝이(不倒翁)란 별명이 붙었다. 김 전 대통령도 연금·투옥·사형선고·망명의 시련을 딛고 일어서 인동초(忍冬草)로 불린다. 두 정치인의 공통분모는 통일 철학에서도 확인된다. 덩은 일국양제(一國兩制) 방안을 고안해 중국과 대만 통일의 주춧돌을 세웠다. 김은 햇볕정책을 주창하고 첫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통일의 물꼬를 텄다.

이런 두 사람과 여러모로 얽혀 있는 인물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김의 최대 정적은 박이었으나, 박을 모델로 삼아 개혁·개방을 시작한 이가 덩이다. 이런 덩의 실사구시를 높게 산 것이 김이다. 절묘한 인연의 고리로 엮여 있는 셈이다. 현실 정치 속에서 김과 덩의 행보는 다소 엇갈렸다. 덩은 경제 성장을 중시했다. 탱크를 동원해 천안문(天安門)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했다. 인권보다는 경제를, 민주화보다는 안정과 질서를 우선한 박을 닮았다. 반면 김은 민주와 인권을 중시했다. 성장보다는 분배 정의를 역설했다. 하지만 과거와 역사를 바라본 두 사람의 태도에선 교집합이 발견된다. 덩은 집권 3년째인 81년 6월 “공적이 먼저고 과오는 그 다음”이라며 마오쩌둥(毛澤東)을 적극 포용했다. 김은 재임 기간에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승인함으로써 박과 사실상 화해했다.

등과 김은 12년의 시차를 두고 영면했다. 1997년 2월 19일 타계한 덩은 유물론자답게 유골이 화장돼 홍콩 앞바다에 뿌려졌다. 동상 건립과 우상화를 반대했다. 유신론자(가톨릭 신자)인 김은 화장 대신 묘지를 새로 조성했고 사후에 동상 건립 얘기도 나온다.

덩과 김에 대한 평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천안문의 원죄 때문에 덩에 대한 최종 평가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김에 대한 평가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민주화와 남북화해를 주목하는 시각도 있지만 지역감정을 심화시켰다는 비판도 있다. 덩과 김에 대한 평가는 오롯이 역사의 몫이다. 다만 색안경을 벗고, 사실에 근거해 진실을 추구하는 실사구시의 잣대를 들이대야 할 것이다.

장세정 베이징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