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산책] 동방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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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동방삭(東方朔·기원전 154~93)은 한(漢) 무제(武帝·기원전 156~87)에게 스스로를 천거해 미관말직에 등용된 이래 평생을 조정에 ‘은거’했다는 익살과 해학의 정치가였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동방삭은 무제가 천하의 인재를 모을 때 죽간(竹簡) 3000개에 자화자찬으로 가득 찬 자기소개서를 황제에게 직접 보내 관직을 얻었다. 한직에 있던 그는 황제의 말을 돌보는 난쟁이를 속여 무제를 가까이서 모실 기회를 얻는다. 이후 무제가 즐기던 사발 속 물건 맞히기 놀이에서 귀신같은 실력으로 승진 기회를 잡았다. 황제의 하사품을 이용해 해마다 젊고 아리따운 여인으로 부인을 갈아 치우는 기행을 펼치기도 했다. 말년엔 주군에게 올곧은 말로 간언도 불사했지만 끝내 중용되지 못한 채 일생을 마감했다.

“나 같은 사람은 이른바 조정에서 세상을 피하는 사람이네. 옛사람들은 깊은 산속에서 세상을 피했지만 말이네.” ‘조은(朝隱)’, ‘대은(大隱)’으로 불린 동방삭은 서슬 퍼런 전제군주시대에 처세술의 달인이었다. “지혜로운 자의 처세로서 중도에 부합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차분하고 자유로우면 자연히 도와 부합하기 마련이니,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서툴고 유하혜(柳下惠)는 뛰어나구나. 안빈낙도하면서 관직으로 농사짓는 일을 대신하라. 은자의 모습에 기대어 세상을 완롱하듯 살되, 시류를 거슬러 화를 만나지 말라. 재능을 다 드러내면 몸은 위험하고 명성을 좋아하면 헛된 영화에 화를 입으리라. 자손에게 너무 많은 유산을 남기지 말라. 일생을 쓴다 해도 그리 많이 못 쓰리. 성인들이 처세하는 이치는 때로 용이 되기도 하고 때로 뱀이 되기도 하니, 가면을 보이기도 하고 참된 마음을 숨기기도 하며, 만물과 더불어 변화하네. 시의에 맞게 따를 뿐, 고정불변의 방법은 없다네(明者處世,無尚於中;優哉遊哉,於道相從。首陽爲拙,柳慧爲工。飽食安步,以仕代農。依隱玩世,詭時不逢。才盡身危,好名得華,有群累生,孤貴失和。遺餘不匱,自盡無多。聖人之道,一龍一蛇。形現神藏,與物變化,隨時之宜,無有常家).” 그가 아들을 훈계한 ‘계자시(誡子詩)’조차 세상을 풍자한 처세술로 가득 차 있다.

동방삭은 한국에선 장수(長壽)의 대명사인 ‘삼천갑자 동방삭’으로 변했다. 원래 수명이 삼십(三十)이었던 동방삭은 십(十)에 한 획을 더 그은 천(千)으로 바꿔 삼천갑자를 살게 됐다. 이에 동방삭을 잡으러 온 저승사자가 성남 분당의 탄천(炭川·숯내)에서 숯을 빠는 꾀를 냈다. 길을 지나던 동방삭이 “내 삼천갑자를 살지만 이런 기괴한 모습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가 신분이 탄로나 붙잡히고 만다. 탄천 이름의 유래다. 서왕모(西王母)의 불사약 복숭아를 훔쳤다는 중국판 설화의 주인공이 한국에서 잡힌 셈이다. 동방삭은 예부터 한·중 양국을 잇는 아이콘이었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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