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검찰윤리강령의 첫 시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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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검사윤리강령이 제정돼 새해 시무식에서 전국 검찰청별로 일제히 선포됐다.

전문 (前文) 과 본문 15개조로 구성된 강령은 검사는 높은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갖춰야 하고 사명감.책임감을 바탕으로 공정하게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는 게 내용이다.

그 중 가장 관심가는 부분은 '검사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어떤 압력이나 유혹, 정실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법과 양심에 따라 엄정.공평하게 직무를 수행한다' 는 조항이다.

얼핏보면 공자 말씀같지만 현재 검찰이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고 검찰 신뢰 회복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30일 대전지검의 자민련 대전시지부와 李모의원 지구당 사무실 압수수색 사건은 현실적으로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말해준다.

사건 개요는 대전시지부장인 李의원이 6.4지방선거 당시 시의원 후보 1명으로부터 공천헌금 1억원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돈을 준 사람은 자백했으나 李의원은 후원금일 뿐 공천 대가가 아니었다고 부인하는 상태였다.

압수수색 소식에 여권 (與圈) 은 벌집쑤신 분위기였다.

공동여당인 자민련과 국민회의가 일제히 검찰을 성토하고 나선 것이다.

자민련은 '내각제 발목잡기 표적 수사' 라며 대변인을 통해 "사전 협의없이 공동 여당 시지부를 수색한 것은 납득할 수 없다" 고 발끈했다.

국민회의측도 미리 귀띔해 주지 않았다며 "검찰이 왜 문제를 일으키는지 모르겠다" 고 불만이었다.

결국 이 소동은 압수 물건들을 되돌려 주고 이튿날 박상천 (朴相千) 법무부장관이 자민련 박태준 (朴泰俊) 총재에게 유감을 표명하는 것으로 마무리됐지만 이로 인해 사건 수사는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

대전시지부라면 자민련의 심장부이므로 압수수색이 사전에 검찰 지휘부에 보고되지 않았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자민련측이 흥분하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보안 유지와 기습이 압수수색의 생명임을 모를리 없는 그들이 '사전 협의' 나 '귀띔' 이 없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여당 정치인은 법 위에 있겠다고 떼쓰는 격이 아닌가.

또 검사의 적법한 수사에 대해 법무부장관이 정당 총재에게 유감을 표명한 것도 문제다.

전국 검찰 조직의 사기는 어떻겠으며 일선 검사들이 여당 정치인 수사는 눈치껏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일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거의 동시에 일어난 '국회 529호실 사건' 은 윤리강령에 나타난 검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첫 시험대다.

이치로 보면 이같은 사건은 국회 내에서 정치력으로 해결했어야 옳았다.

입법부 수장인 국회의장이 국회의원을 처벌해 달라고 행정부에 내맡긴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꾸중하고 가르쳐야 할 자식을 남에게 때려달라고 넘겨준 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회사무처 측이 국회의 주인격인 의원들을 고발하고 나선 것도 볼썽 사나운 일이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국회 안에서 조사하고 처벌하는 게 바람직했다.

그러나 검찰의 이 사건 처리 과정이 벌써부터 석연치 않은 점이 있으니 걱정이다.

대규모 수사전담반을 만드는가 하면 참고인 조사를 새벽까지 하는 등 서두르는 모습이 역력하다.

수사 착수도 전에 대여섯가지의 적용 죄명부터 들먹이는 것이나 무슨 강력사건이나 난 것처럼 지문 감식하는 모습도 어색했다.

검찰은 지금까지 정치적 사건을 처리하며 한번도 재미본 적이 없다.

특히 '529호실 사태' 는 안기부의 정치사찰 의혹과 한나라당의 강제진입 부분이 맞물려 있어 더욱 처리가 쉽지 않다.

사건의 본질인 사찰 의혹 부분을 제쳐놓은 상태에서 검찰이 강제진입 부분 수사만 요란하게 해서 국민들의 관심을 한쪽으로 쏠리게 한다면 잘못이다.

이 경우 자칫 검찰은 사건의 핵심에는 접근하지 못한 채 정치판의 들러리가 되고 한쪽을 편드는 결과를 낳아 또 다른 편파 시비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검찰이 이 사건을 일반 고소.고발사건과 똑같이 취급하는 여유를 가지면 어떨까. 필요하면 경찰에 이첩, 지휘할 수도 있고 고소인이나 참고인 조사도 절차를 밟아서 하라는 것이다.

시간을 벌면 정치권도 냉각될 것이고 정치적으로 해결되면 검찰의 부담도 그만큼 줄어들지 않겠는가.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력.능력 부족을 검찰권으로 메우려는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백년하청 (百年河淸) 일 수밖에 없다.

아울러 검찰 수뇌부의 특별한 용기와 지혜, 결단 없이는 검사윤리강령의 정치적 중립 조항은 영원한 구두선 (口頭禪)에 그칠지도 모른다.

권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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