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제7장 노래와 덫

이튿날 아침, 합천 장터에 두 사람을 내려준 철규는 승희와 동행으로 창녕으로 달렸다.

합천에서 동남쪽이 되는 창녕은 24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가 중간 지점인 양진에서 낙동강을 건너는 경남 내륙의 전형적인 전원풍경을 이루는 곳이었다.

그들은 어느덧 경남의 내륙 깊숙한 곳까지 도달하였지만, 하루돌이로 장바닥만 찾아다니는 터라, 이제 와선 어느 고장을 찾아가든 낯설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게다가 예년 같았으면 혹한이 몰아닥칠 한겨울인데도 날씨는 더없이 포근해서 떠돌이 행상들이 겪어야 하는 매몰찬 비애도 몸서리치게 느낄 수 없었다.

국도로 들어서면서 자동차에는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운전석 차창에 서리는 성에를 걸레로 닦아주는 일 이외에 승희의 시선은 사뭇 하얀 서리를 뒤집어 쓴 채로 재빨리 스쳐가는 삭막한 겨울경치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마음 속은 어느 때보다 뒤숭숭했다.

그들 일행이 주문진을 떠난 이후, 남의 이목을 벗어나 두 사람만이 자리를 같이하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동업자들이기 때문에 주어진 자연스런 동행이었을 뿐, 별다른 의미를 가졌다고 볼 수는 없었다.

철규가 창녕장에 그녀와 동행하기로 거리낌없이 결정해 버린 것이라든지, 운전하는 중에서의 냉랭한 침묵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승희 역시 운전석에 응고되어 있는 냉소적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승희는 긴장되어 있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 희미하게 깔려 있음직도 한 그녀에 대한 철규의 애증을 불러일으켜 세워야겠다는 알량한 속셈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티없이 순수한 연민이었다.

태호의 말대로 그가 겪고 있을 뜨끈뜨끈한 상처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그것을 재빨리 치유하고 행상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그를 추슬러 줄 수 있는 지혜를 찾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운전석에서의 오랜 침묵속에서 깨닫기 시작했다.

그 침묵의 가닥에 몸을 싣고 있노라면 철규의 가슴 속에 도사리고 있는 그녀에 대한 해묵은 거부감을 섬뜩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섣불리 한마디를 거들었다간 이미 사그라진 애정에 다시 불을 댕기려 드는 구차한 행동으로 오해받기 십상이었다.

철규에게 비치고 있는 승희의 존재는 무엇일까. 주문진 포구에는 그녀 한몸의 생계쯤은 거뜬하게 유지시켜 줄 수 있는 어엿한 점포가 있었다.

그것을 두고도 노점행상을 자처하고 나선 그녀로선 오직 철규 때문이란 태호의 말처럼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승희가 품고 있는 지금 당장의 심정은 그것이 아니었다.

철규에겐 휴식이 필요했다.

며칠 전부터 그의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잠자리에선 난데없는 헛소리까지 한다는 얘기를 태호로부터 들었다.

온천장으로 가서 이틀 정도만 휴식을 갖자는 태호의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한 것도 어쩌면 가슴 속 상처가 갖고 있는 회한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는 그 상처에 탐닉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헤어진 여자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려는 노력이 처절할수록 그와 비례하여 미련은 오히려 더 큰 중량감으로 그를 옥죄어 든다는 것을 승희의 시선에서는 너무나 뚜렷하게 바라보였다.

그러나 그를 사로잡을 수 있는 한마디 말도 궁했다.

자동차가 길모퉁이를 급회전할 때마다 바퀴에서는 명주폭을 칼로 찢어내는 듯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뒤따르는 자동차가 있다면 졸음운전이나 취중운전으로 취급당할 만 했다.

약간의 위험까지 느꼈지만 승희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그 침묵에 맞대응이라도 하듯 철규는 더욱 거칠게 차를 몰았다.

아직은 아침 8시. 그토록 빨리 달려가야 할 일이 없는데도. 그러나 승희는 어느덧 위기감에서 벗어나 이상하게 느긋해졌다.

까짓거 사고가 날테면 나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때묻어 반질거리는 시트에 목덜미를 기대며 다리를 쭉 뻗었다.

그리고 철규를 힐끗 돌아보며 가볍게 웃었다.

철규가 속도를 줄인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리고 오랜 침묵을 깨고 승희에게 물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