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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죽음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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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임금의 부름은 죽음을, 첫째 친구는 재물을 비유한 것이다. 아무리 가까이 두고 싶어도 죽을 때 재물을 가져갈 수 없다. 둘째 친구는 친척이다. 장례식장까지는 따라가지만 그를 두고 돌아간다. 셋째 친구는 사랑의 선행이다. 평상시에는 크게 눈에 띄지 않지만 죽음의 순간에도, 이후에도 선행은 영원히 함께한다. 탈무드에 나오는 ‘세 친구’ 이야기다.

죽음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슬픈 운명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어떠한 인간적인 언어로도 죽음의 허무함과 슬픔을 달래줄 수 없다.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 죽음이라면 가장 불확실한 것이 죽음의 때다’라는 라틴어 속담이 있다. 죽음의 순서는 없고 미리 체험할 수도 없다. 늘 남의 일처럼만 여겨지는 사고와 중병이 언제든 나의 일이 될 수 있다. 성경에 ‘어제는 그의 차례요 오늘은 네 차례다’(집회서 38장 22절)라는 말씀이 나온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에는 사망사건과 사고 뉴스가 끊이지 않는다.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매일 듣고는 있지만 무감각한 것은 나의 죽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가 막상 죽음을 가까이 접하게 되면 큰 두려움을 느낀다. 그 누구도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죽음도 인생의 순리로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결국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삶을 준비하는 것이다.

얼마 전 공개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기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그는 ‘인생은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얼마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느냐가 문제다. 그것은 얼마만큼 이웃을 위해서, 그것도 고통받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느냐가 문제다’라고 쓰고 있다. 한 인간이 평생을 통해 얻은 삶의 깨달음이라 해도 좋으리라. 만약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떠할까? 매일을 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우리의 삶은 크게 변화될 것이다.

‘덕망은 장례식 다음에 향기가 난다’는 속담처럼 사람은 죽은 다음에야 그 사람의 참모습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인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하는 계획이 꼭 필요하다. 이런 준비는 노인이나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만이 아니라 세상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도 필요하다. 죽음을 준비하는 삶은 역설적으로 충실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준다. 임종을 앞둔 이들을 돌보는 호스피스 봉사자들은 “제대로 산 사람만이 잘 죽을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올해는 유독 우리나라의 큰 어른들이 세상을 떠나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러면서도 그분들은 우리에게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인생을 완성하는 의미를 갖는다는 소중한 가르침을 준다.

허영엽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