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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DJ 외교’부터 배워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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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DJ는 국내정치뿐 아니라 외교에서도 거인이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 2년간 미국에 유배된 끝에 1985년 김포공항에 돌아온 그의 옆엔 미국의 헌법기관인 하원의원 두 사람, 에드워드 페이건·토머스 폴리에타가 서 있었다. 전두환 정권이 공항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걱정한 이들이 ‘경호조’를 자청하며 함께 여객기를 탄 것이었다. DJ는 또 미국 대통령 2명을 생명의 은인으로, 1명을 평생의 벗으로 가졌다. DJ가 투옥과 연금을 잇따라 당했던 박정희 정권 시절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은 박정희에게 협박에 가까운 어조로 DJ의 석방을 요구했다. 80년 미 대선에서 카터가 낙선하고 공화당 후보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되자 당시 사형수였던 DJ는 “하느님이 날 버리셨다”며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카터의 조언을 들은 레이건 역시 DJ의 사형을 강력히 반대했다. 전두환은 DJ의 감형을 약속한 뒤에야 레이건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 대통령 사상 처음으로 혁신적인 외교노선을 표방했던 DJ는 역설적으로 미국의 힘과 일본의 영향력을 몸으로 체득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집권 뒤 북한과 대담한 해빙에 나서기 전 한·미·일 삼각동맹을 다지는 노력부터 했다. 남북 정상회담을 전후해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에게 최측근을 보내 회담의 전 과정을 브리핑해준 게 대표적이다. DJ를 신뢰하게 된 클린턴은 남북 정상회담을 적극 지지했고, ‘평생의 벗’을 다짐하는 사이까지 됐다. DJ는 일본의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도 도쿄 피랍의 앙금을 털고 “과거를 문제삼지 않겠다”는 ‘신 한·일 파트너십’을 선언해 일본인들의 마음을 샀다. 그러면서 장쩌민 중국 주석, 보리스 옐친·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도 두루 친한 외교술을 선보였다. 보수성향의 미국 정치학자 마이클 그린은 “DJ는 주변 4강과 모두 친하면서 대북관계를 개선하는, 한국에 꼭 필요하나 실현하긴 힘든 난제를 풀어낸 전무후무한 지도자”라 극찬했다.

DJ의 외교는 집권 말기 부시 미 대통령과 갈등을 빚고, 대북 송금 시비에 휘말리는 등 흠도 남기긴 했다. 그러나 한국의 대북·대외적 지평을 넓힌 점에서 그의 공은 넓고 깊다. 이런 성과 뒤엔 그만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오랜 세월 미국·일본의 정계 거물·외교관들과 두터운 교분을 쌓았고, 방대한 독서로 독자적인 통일론·세계관을 수립했다. 그의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는 민주당은 유감스럽게도 이런 노력을 이어받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북한이 핵실험을 해도, 미국이 강경대응을 고수해도 “이명박 정부 탓에 남북관계가 파탄 났다”는 한마디밖에 할 줄 모른다. 민주당이 진정 통일·외교에서 DJ를 잇는 정당이 되고 싶다면, 미국과 중국에 인맥을 쌓고 국제정세를 공부하는 노력부터 할 일이다.

강찬호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