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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된 파바로티, 전설을 만드는 한국인 칼리프 왕자 홍성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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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호 04면

1 제1막 중 페르시아 왕자의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군중신.

매년 여름,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향인 이탈리아 베로나는 오페라의 도시가 된다. ‘베로나 아레나 오페라 축제’ 때문이다. 2세기 초 로마시대에 투기장으로 건설된 원형 경기장(Arena di Verona)이 최대 2만5000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야외 오페라 무대로 변신하는 것이다. 이 페스티벌은 베로나 출신의 오페라 가수 조반니 제나텔로(Giovanni Zenatello)와 극장 기획자 오토네 로바토(Ottone Rovato)가 베르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1913년 8월 10일 처음 개막했다. 이 야외 오페라는 크게 성공해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 후 제1, 2차 세계대전 때를 제외하고 매년 6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열린다.

김성희의 유럽문화통신: 이탈리아 베로나 오페라 축제 ‘투란도트’

87회를 맞이하는 올해에는 6월 19일 플라시도 도밍고가 감독하고 프랑코 제피렐리(Franco Zeffirelli)가 무대 감독을 한 비제의 ‘카르멘’으로 시작했다.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인 베르디와 푸치니의 작품들이 주로 연주된다. 7일 푸치니의 ‘투란도트’ 를 보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폴트로니시미(Poltronissimi)라고 불리는 가장 앞자리는 150유로(약 27만원)가 넘는다.

무대는 어마어마했다. 중앙에는 거대한 구(球)가 위압감을 주며 자리 잡고 있었다.양 옆과 뒤편에 중국풍의 여러 장식이 투란도트의 배경을 설명해주었다. 사방이 어둑어둑해진 밤 9시. 분장을 잔뜩 한 빨간 옷을 입은 단원이 나와 징을 쳤다. 관객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촛불을 켰다. 공연 시작 전에 지휘자와 공연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아레나의 전통 의식이다.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지휘자 다니엘 오렌(Daniel Oren)이 입장하자마자 공연은 시작되었다.

2 투란도트 공주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칼리프 왕자 홍성훈. 사진 제공 베로나 아레나 재단 Per gentile concessione di Fondazione Arena di Verona.

웅장한 무대가 약 300명가량의 오페라 단원들과 출연진들이 부르는 노래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야외극장이지만 인공 음향효과를 사용하지 않아도 속삭이는 소리까지 잘 들릴 정도로 아레나의 음향효과는 매우 뛰어났다. 주인공인 칼리프 왕자는 생각보다 키가 작고 통통했지만 호소력과 전파력 있는 노래를 불렀다. 공연 프로그램을 읽어보니 그날의 테너 가수는 바로 이탈리아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Francesco Hong(홍성훈)’이었다.

‘들어주세요 시뇨레!(Signore Ascolta)’, ‘울지 마라 류(Non piangere, Liu)’ 등의 아리아가 흐르는 1막과 칼리프 왕자가 투란도트 공주가 내는 세 개의 수수께끼를 푸는 2막이 끝나고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는 3막이 시작되었다. 일부러 시간을 맞춘 것도 아닐 텐데, 원형 극장 무대 왼쪽 뒤로 보름달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 아래서 칼리프 왕자는 너무나도 유명한 아리아 ‘아무도 잠들지 마라(Nessun Dorma)’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곡은 파바로티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불렀던 곡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그가 부른 ‘Nessun Dorma’를 잊지 못한다. 그리고 어떤 테너 가수가 부르던 파바로티의 그것에 비교한다. 파바로티는 호흡 시 배로 그랜드 피아노를 움직일 정도로 풍부한 폐활량을 가지고 있었고 관객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이입시키며 드라마틱하게 노래했다. 곡의 마지막 부분을 얼마나 길게 늘여 불렀는지 청중은 곡이 끝나기도 전에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곤 했다. 그 후로 사람들은 이 곡만큼은 파바로티의 해석을 최고로 여겼고 이는 모든 테너 가수들에게 큰 부담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날의 칼리프 왕자는 파바로티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곡을 잘 소화했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관객들로부터 5분간 박수를 받았다. 사람들은 앙코르를 외쳤고 박수를 치다 못해 발까지 굴렀다. 칼리프 왕자는 한 점의 동요도 없이 먼 하늘을 보며 청중의 박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음 노래로 이어갔다. 공연이 끝나고 청중은 기립박수를 쳤다. 그리고 칼리프 왕자는 감동에 못 이겨 관객에게 큰 절을 했다. 2000년 전 만들어진 돌계단 위에 앉아 있던 관객들은 노래에 취하고 달빛에 취해 좀체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이탈리아 밀라노를 무대로 활약 중인 보석디자이너. 유럽을 돌며 각종 전시회를 보는 게 취미이자 특기. 『더 주얼』(2009)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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