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自充手 빅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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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권이 바뀌면 재벌들은 자라목이 돼 눈치를 살핀다.

어느 줄을 잡아야 할지 충분히 탐지한 뒤라야 서서히 행동을 개시한다.

몸에 밴 안전책이요, 생존술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그게 아니다.

IMF의 강요에 더해 새 정부의 개혁바람까지 휘몰아쳤으니 줄잡을 틈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추세면 재벌체제의 해체는 시간문제다.

현정권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기존의 재벌체제는 자동 해체되게 돼 있다.

장부정리를 정직하게 하고 지나친 부채경영과 족벌경영에 철퇴를 가하는 것은 꼭 필요한 정책이요, 이에 대한 정부 개입도 지극히 당연하다.

새 정권 출범과 함께 재계에 요구했던 5개원칙 제시가 바로 그것이었다.

재벌옹호론자들의 입을 완전히 봉해버린 일격의 카운터블로였다.

그러나 잘 나갈 땐 역시 브레이크가 안듣는 법일까. 여기서 정부가 너무 나가버린 게 탈이었다.

다름 아닌 빅딜이라는 자충수. 빅딜에 정부가 깊이 개입해선 안되는 까닭은 너무도 자명하다.

기업들의 장삿속에 정부가 무엇을 안다고 끼어들며, 끼어든들 무슨 역할을 하고 그 결과에 대해 누가 무슨 책임을 진다는 말인가.

거짓말하는 기업을 벌주고 규칙을 어기는 기업을 혼내는 일이야 마땅히 정부 몫이지만, 위험과 모험이 본질인 기업 비즈니스에 왜 정부가 끼어들어 날짜까지 찍어가며 합쳐라 갈라라 한단말인가.

80년 중화학투자조정의 실패에서 그만큼 정부 체통을 구겼으면 됐지, 왜 또 이러는지 정말 모르겠다.

지금까지의 경과를 돌이켜 봐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적지 않다.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가 직접 나선 것부터가 어색한 시작이었다.

더구나 묘한 것은 주요 포스트 인물들이 처음에는 저마다 빅딜을 몰랐거나 반대했었다는 사실이다.

구조조정의 사령탑격이던 이헌재 (李憲宰) 금감위원장은 일의 시작을 까맣게 몰랐었고, 강봉균 (康奉均) 경제수석은 부임 직후 "내 입에서 빅딜이라는 말을 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고 말했었다.

전윤철 (田允喆) 공정거래위원장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업 자발적인 사업 교환정책이 바람직하다" 고 밝혔었다. 실력자들은 모두 반대했던 셈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태도 역시 1백80도 달라졌다.

마치 정부와 재벌의 힘겨루기처럼 변질되고 말았다.

이럴 경우 그 다음 순서가 어찌되는지는 볼 것도 없다.

급기야 대통령이 직접 역정을 내기에 이르렀다.

모범을 보여야 할 재벌들이 오히려 나라 신용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개탄했다.

기업들은 다시 자라목이 됐다.

정부의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지를 충분히 깨달았으리라. 더구나 기업마다 약점들이 수두룩하니 정부 말을 거스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D그룹이 최근 화다닥 구조조정을 벌인 것도 다 그런 배경이 깔려 있었던 결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강 정부에 대해 줄기차게 저항하고 있는 LG그룹의 용기 (?) 는 정말 뜻밖이다.

저간의 내용이야 어찌됐든 간에 LG는 줄곧 현대와의 반도체 합병을 거부하고 있다.

컨설팅회사를 상대로 불만을 터뜨리고 있지만 사실은 정부에 대한 저항이다.

도대체 무얼 믿고 저러는지 의아해 할 정도로 용케 버티고 있다.

돈 대달라고도 안 할테니 제발 괘씸죄로만 다스리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자금도 확보해 놓았고, 더 필요한 돈은 다른 회사를 팔아서라도 반도체 사업은 꼭 해야겠다는 것이 LG측의 주장이다.

일개 재벌회사가 정부를 상대로 이처럼 맞서는 것 자체가 뉴스다.

형편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정부가 '왜 합병약속을 안 지키느냐' 고 몰아붙이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대상업체가 LG냐 현대냐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아무리 구조조정의 돈줄을 쥐고 있기로서니 특정기업한테 이 사업을 해라, 저 사업을 말아라식의 강요는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지극히 기본적인 원칙을 너무도 아무렇지도 않게 정부 스스로가 깨뜨리고 있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정부의 충고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해당기업이 저처럼 사생결단으로 자기사업을 하겠다는 데도 말이다.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의 합병에서 보듯 서로 합의한 빅딜마저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하물며 싫다는 회사들을 굳이 합쳐서 무슨 일이 제대로 되길 기대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청와대 대변인까지 나서서 빅딜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정부가 자충수를 두고 있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이장규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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