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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KDI 입막음 당했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현 정부 출범 이후 한국개발연구원 (KDI)은 예전과는 사뭇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새 정권 경제인맥의 주류중 한 사람인 이진순 (李鎭淳) 원장이 들어앉으면서 또다른 '국책연구기관'이 되지않겠느냐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그후 구조조정.재정정책 등 정부정책을 거침없이 비판하면서 새롭게 주목을 받아오던 터였다.

이런 비판들은 외부의 역풍을 차단하고 내부에 자유로운 언로 (言路)가 열려있을 때 가능하다. 하지만 최근 이른바 빅딜과 관련해 KDI에 난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KDI 내부에선 현재 추진중인 정부 주도의 빅딜은 과다설비.과다부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없기 때문에 신중히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청와대에 이같은 내용의 보고서도 몇차례 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KDI 고위 관계자는 최근 사석에서 "잘못됐을 때 책임져야할 사람도 분명히 하지 않은 채 누가 빅딜을 강요하는지 모르겠다" 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이런 목소리는 비공식적으로만 들릴 뿐이고 그나마 점차 잦아들고 있다.

최근 KDI의 한 연구위원은 공개 세미나에서 "정부의 재벌정책은 빅딜정책으로 인해 자승자박의 상황에 이르렀다" 며 "정부는 빅딜정책을 사실상 백지화한다는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가 질책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정책의 이론적 틀이나 제공해야할 KDI'가 오히려 핵심 과제인 빅딜을 비판하고 나선다며 정부 고위층들이 발끈했고 그래도 연구위원들을 두둔하던 KDI 고위 관계자는 심하게 질책당했다는 후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 목소리를 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최근 배순훈(裵洵勳) 정보통신부 장관이 "삼성과 대우의 빅딜을 이해못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옷을 벗었다.

정부 각료도 개인적으로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일단 정해진 일에 대해 돌출행동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는 게 대다수의 생각인 듯 싶다. 하지만 연구기관의 연구위원은 전혀 다르다. 오히려 적절한 비판을 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이들의 일이자 책무다. 이를 막아서 기대하는 것이 만일 '일사불란' 이라면 이는 더욱 위험하다.

올 1년 우리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IMF체제도 그 이전 환율정책에 대한 비판 봉쇄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박의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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