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과학 칼럼

지구와 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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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달은 행성 지구에 버거운 존재로 군림한다. 모행성인 지구에 비해 위성인 달의 덩치가 만만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태양계에서 이렇게 묘한 ‘궁합’의 또 다른 쌍은 찾아볼 수가 없다. 달의 기원이 80년대 후반까지 두꺼운 베일에 가려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월석에는 철과 잘 결합하는 이리듐·백금 등의 원소와 철이 결핍돼 있다. 지구는 철이 풍부하므로 지구와 달이 동일 원료에서 동시에 태어난 하나의 쌍이라고는 볼 수 없겠다. 소행성대에서 날아오는 운석에 비해 월석은 극도로 건조하다. 월석에선 물 분자가 전혀 검출되지 않기 때문에 달은 지구가 포획한 소행성이라고도 할 수 없다. 휘발성 원소인 탄소와 질소는 물론이고 융점(融點)이 낮은 칼슘·아연 등도 월석에 현저히 결핍돼 있다. 월석은 지구의 맨틀과 그 성분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지만 휘발성 원소의 결핍 때문에 지구의 맨틀 일부가 떨어져 나가 달이 됐다고도 할 수 없겠다. 달 형성에 관한 쌍 집적, 포획, 분리 이론이 모두 아폴로가 던진 월석에 의해 깨져버렸다.

그러면 달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달 형성에 관한 거대 충돌 이론에 의하면 미행성의 충돌·병합으로 성장 중이던, 원시 지구의 질량이 현재의 반쯤 됐던 시기에 우연히 벌어진 하나의 충돌 사건에서 달이 태어났다고 한다. 충돌 당시에 무거운 철은 이미 중심에 가라앉아 원시 지구의 핵을 이루었고, 가벼운 규산염 성분의 맨틀이 그 바깥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때 구조는 비슷하지만 질량이 지구의 4분의 1쯤 되는 또 다른 원시 행성체가 원시 지구와 비스듬히 충돌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거대 충돌 이론이 우연에 의존해 설정한 초기 상황이다.

충돌 이후에 전개되는 일련의 필연적 사건들은 컴퓨터 화면에서 자연스럽게 재연할 수 있다. 두 충돌 천체는 충돌 후 몇 차례 진동하다가 각각의 핵이 하나로 뭉쳐 지구의 중심핵을 만든다. 그러고 맨틀의 일부가 밖으로 떨어져 나가 토성의 고리와 같은 회전 원반을 이루다가 다시 엉겨 붙어 달로 태어난다. 휘발성 원소는, 충돌 에너지로 뜨겁게 가열된 맨틀 물질에서부터 우주 공간으로 증발하게 되고, 철을 좋아하는 성분은 철과 함께 중심핵에 완전히 묶여버린다. 거대 충격 이론은 이처럼 월석의 화학 조성을 완벽하게 설명할 뿐 아니라, 지구와 달 사이에 벌어진 조석(潮汐) 진화도 잘 기술한다. 비스듬한 충돌로 인해 지구는 다른 지구형 행성들보다 빨리 자전하게 됐으며, 무거운 달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지구의 자전축은 기울기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자전축의 안정이 지구 기후의 안정을 가져와 생명의 진화와 번식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인류도 달의 덩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45억 년 전에 있었던 우연한 충돌이 오늘 내게로까지 이어지는 필연의 연속을 불러왔다. 인생은 만남이라고 한다. 이는 만남의 우연성을 두고 하는 말일 게다. 하지만 우연한 만남에서도 내가 이끌어낼 수 있는 필연이 따로 있기에 인생은 살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홍승수 서울대 교수·물리천문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