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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역사는 고칠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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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요즈음 한국의 정치.사회는 '과거사 청산'이라는 일로 떠들썩하다. 경제가 좋지 않아 여기저기서 살림이 어렵다는 소리가 들려오는 상황인데 정치권, 특히 여당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이름 아래 일제하의 친일행위를 철저히 규명하고 박정희 군사정권의 유신도 다시 청산해야 한다는 등 지난 일을 들춰 재론.삼론하는 데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주변에서 우리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건드리는 일이 계속되고 있어 심기가 불편하다. 우리가 늘 동해라고 불러온 바다를 남들은 아직도 일본해라고 하고 있어 마음이 편치 않은데 일본은 그 바다에 있는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면서 자기 것이라고 계속 우기고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은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의 일부라고 하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이를 왜곡하려 하고 있다.

여기에 대미관계 악화 등 어려운 문제들이 겹쳐 있다. 그런데 정치권은 동학농민혁명, 친일행위, 제주 4.3사건, 6.25 민간인 희생, 각종 의문사 진상규명, 비전향 장기수 문제, 유신 청산과 관련된 정수장학회 진상조사 등에 매달리며 소모적인 논쟁을 거듭하고 있다.

무릇 과거를 잘 정리하고 챙기는 것은 중요하다. 과거를 쉽게 잊는 사람은 교훈을 익히지 못하고 잘못을 반복할 수 있고 따라서 현재와 미래의 경영에서 성공하기 어렵다. 과거에 너무 집착하는 것도 좋지 않음은 물론이다. 지금 한국의 정치권이 벌이고 있는 과거사 청산 작업이 특히 유감스럽고 걱정스럽게 보이는 이유는 다분히 여당의 대야(對野)공략 일부로 추진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자랑스럽든 부끄럽든 역사는 역사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은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느냐에 관계없이 사실로 남는다. 예컨대 한국 정부는 일제의 잔재를 없앤다고 과거 총독부 건물이었던 중앙청을 일찌감치 허물어 버렸다. 하지만 설사 중앙청을 10번, 100번 허문다고 해도 일본이 우리를 점령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역사를 고치려 해서는 안 된다.

역사를 정치적 책략으로 이용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적을 공략할 목적으로, 또 정치적 명분을 정당화하고 입지를 강화할 목적으로 역사를 다시 들추려 할 때 왜곡과 모순이 저질러지기 쉽다. 간첩과 빨치산을 민주화투쟁 인사라고 인정하게 됐는가. 어떤 사람들은 김일성보다 박정희를 더 싫어하게 됐는가. 어쩌다가 6.25 때 수많은 우리 형제를 죽였고 지금은 고구려까지 빼앗아가려고 하는 중국보다 피를 흘려가면서 지금껏 우리를 도와준 미국을 더 나쁘다고 생각하게 됐는가. 역사를 가지고 장난한 결과가 아닐까.

친일행위를 했던 사람들은 이제 거의 다 죽고 없다. 그래서 그들의 행적을 지금 다시 검증하는 것은 자칫 오늘의 잣대로 과거를 단죄하는 모순을 저지르게 된다. 그들이 가고 없으니 그들의 자손을 비난하겠다는 것은 더욱 타당치 않은 일이다. 특히 잘한 일에 대한 공적이나 못한 일에 대한 책임이 오직 본인에게 귀착되는 미국 사회의 철저한 본인 책임주의 관점에서 봤을 때 "네 외할아버지가 친일했으니 너도 나쁘다"라든가 "네 증조부가 독립투사였으니 너도 장하다"와 같은 사고와 논리를 미국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한국이 진정 발전된 미래를 지향한다면 글자 그대로 앞을 봐야 한다. 과거의 패배의식.열등의식.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일본 총리가 신사참배를 했다고 이러쿵저러쿵할 필요가 없다. 동해를 동해라고 불러달라고 호소하고 애걸할 필요도 없다. 이런 것들은 국력이 신장되면 저절로 챙겨질 일이다. 사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왜곡하려 하는 것도 장차 통일한국이 갖게 될 저력을 미리 견제하려는 속셈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한국에는 가령 Korea를 Corea로 바꿔 쓰는 것이나 '國'이라고 돼 있는 국회의원 배지를 '국'으로 바꾸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다. 그러나 친일행위나 의문사 진상을 규명한답시고 정치적 명분이나 이념의 색안경을 쓰고 역사를 주물럭거리는 일은 중요한 일도 아닐 뿐더러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장석정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