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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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제6장 두 행상

갑작스런 한파가 몰아친 것은 배완호가 일행들이 체류하고 있는 의성에 도착하던 날이었다.

옷깃에 스치는 바람이 매섭기가 칼끝 같았다.

얇은 바지 속으로 새어드는 한기로 사추리가 탱탱하게 당겨 올랐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려 숙소로 가던 그는 햇살이 잘 드는 구멍가게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흐린 하늘이 걸려 있는 산등성이 저 쪽으로 물끄러미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은 이런 낯선 고장까지 흘러와 남의 집 추녀 아래서 떨고 서 있는 것일까. 갈 곳 없는 탁발승들이나 생각해야 할 상념이 갑자기 뇌리를 스쳤다.

아내가 기다리는 집이 그리웠다.

집을 다녀오겠다고 떠난 길이었는데, 대전 쪽으로는 가지 않고 수작 한번 건네보지 못한 엉뚱한 여자만 먼 빛으로 바라보다가 소득 없이 돌아선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그 순간 모멸스러웠다.

그 모멸감의 끝자리쯤에 항상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던 미련이란 무게도 그 땐 시들하고 역겨웠다.

단출한 세 식구의 생계유지를 위해 가장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일까. 그리고 남의 여자에 눈길을 빼앗기는 이런 못난 짓뿐인가.

햇살을 쬐고 있던 그는 공중전화를 찾았다.

윤종갑은 숙소에 있었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삼촌, 나 지금 대전으로 가는 중입니다. " "대전? 나한테 한 말은 그게 아니었잖여?" "그게 아니었지만, 정말 대전으로 가기로 결심해 버렸어요. 그래서 연락드리는 겁니다. " "나한테 섭섭한 일이라도 있었나? 엉뚱한 소리 말고 얼른 오게나. " "엉뚱하다니오?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가겠다는데 엉뚱한 생각 가진 사람으로 몰아붙이면 어떡합니까. "

"그깐 일로 언성까지 높일 건 없구…. 이제까지 끽소리 없이 있다가 불각시에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니까, 내가 얼마나 황당하겠나. 자네 말투를 들어 보면, 며칠 다녀오겠다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우리와 이별하자는 말처럼 들려서 그러네. 사람이 심지가 깊어야지. 일을 이만치 벌여놓고 가긴 어딜 가겠다는 게야? 우리 사이가 공중전화 찍 걸어서 꿋빠이해도 좋을 만큼 맹탕인가? 남들은 우리 사이를 인척간이라 부르네. "

"삼촌이니까. 전화 드리는 것이지 남남이면 번거롭게 전화는 왜 걸겠어요. " "도대체 거기가 어디야? 내가 달려가지. " "고속도로 휴게솝니다.

" 전화는 저절로 딸깍 끊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다시 걸려올까 했으나, 전화벨은 끝내 다시 울리지 않았다.

젊은 놈들의 변덕이란 게 오리무중이어서 도무지 짐작할 수 있어야지. 밑도 끝도 없이 집으로 간다고? 망할 놈의 새끼. 윤종갑은 죄없는 수화기를 다시 들어 쾅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어떤 연유로 말미암은 변덕인지 모르겠으나 대전에서 며칠 지나고 나면 돌아오게 되리란 짐작은 어렵지 않았다.

그 동안 불어난 밑천에 미련을 갖기는 삼촌인 자신이나 조카인 배완호 역시 마찬가지란 믿음도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윤씨는 그를 째려보는 봉환의 눈길에 질끔하였다.

통화 내용을 봉환이가 엿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짐작 때문이었다.

그러나 봉환은 노려보기만 할 뿐 통화한 사람이 누구냐는 말조차 없었다.

그리고 중개상회로 간다며 훌쩍 나가버렸다.

그러나 노려보기만 하다가 말없이 나가버린 봉환의 거동이 마음에 걸렸다.

이러다가 일행 모두를 놓치고 혼자 남는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낭패가 가슴을 쳤다.

봉환을 놓치면 예사 낭패가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숙소를 나섰다.

이번 행배는 서울에서 곧장 주문진으로 가 겨울장사에 대비할 품목을 찾아야겠다는 구상이 떠올랐다.

이젠 가락시장에서 곧장 의성으로 되돌아올 까닭도 없었기 때문에 봉환이도 반대는 않을 것이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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