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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치병 환자에 '사랑 이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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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아이와 참 특별한 인연을 맺었습니다. 백혈구 형이 서로 맞을 확률이 2만분의 1밖에 안 된다는데…."

"필요하면 세 번이고, 네 번이고 계속 제 골수를 줄 수 있으니 안심하고 치료받으라고 전해주고 싶어요."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기만 기원하고 있습니다."

"결혼하면 아내에게도 골수 기증을 권할 거예요."

"아내가 말리면 '환자나 그 가족의 입장이 돼보라'고 할 겁니다."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살벌한 세상이지만 훈훈한 인정은 여전히 살아 있다. 낯 모르는 백혈병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골수를 아낌없이 기증한 육군 대위 김진웅(28)씨.

그는 남들이 평생 한번 하기도 힘든 골수이식을 지난 8개월 새 두번이나 했다. 아낌없이 준 것은 골수만이 아니다. 크지 않은 체격(164㎝, 62㎏)이지만 헌혈도 18회나 했다.

8일 충북 영동의 한 육군부대에서 만난 김 대위는 "골수 기증을 처음 마음먹은 것은 심신이 지쳐있던 소위(2000년) 때였다"고 말했다.

"휴가 때 동서울터미널의 '헌혈의 집'에 들렀습니다. 여기서 골수 기증자 모집광고를 보고 바로 신청했어요."

그 뒤 이 사실을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지난해 9월 휴대전화로 "김진웅씨, 맞습니까"를 묻는 전화가 걸려 왔다.

"백혈병에 걸린 아이와 제 골수의 백혈구 형이 95% 맞는다는 것이었습니다. 100% 일치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혈액검사를 한번 더 하자고 하더군요."

두 사람의 백혈구 형은 꼭 들어맞았다. 확률 2만분의 1의 인연이었던 셈이다.

"국제 관례상 골수 기증자와 이식자가 서로 신상정보를 아는 것이 금지돼 아이에 대해 물어볼 수가 없었지요. 하지만 어떤 아이일까 무척 궁금합니다."

지난해 12월 상태가 위중한 아이에게 자신의 골수를 주기 위해 외박(2박3일)을 신청한 그는 퇴근 뒤 충남의 한 병원으로 향했다.

"금요일 아침 일찍 수술실에 들어갔는데 두세 시간쯤 걸렸어요. 전신마취를 해서인지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이날 수술실에서 의료진은 쇠젓가락 같은 도구로 그의 엉치뼈 6곳(직경 3~5㎜)에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500㎖의 골수를 뽑아 아이에게 이식했다.

"수술 다음날 부모님께 '잘 끝났다'고 전화 드렸더니 '좋은 일 했다'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물론 처음엔 반대가 심했지만 '후유증이나 부작용이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1주일은 지혈이 안돼 애를 먹었다.

"골수이식 뒤 바로 근무했기 때문에 주사 부위가 아물었다 터지기를 반복했어요.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느껴져 한동안 무거운 것을 들지 못했지만 한달쯤 지나자 거의 회복됐습니다."

그의 엉덩이에 '사랑의 선물'인 여섯 군데의 흉터가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던 올 7월. 한국조혈모세포은행협회로부터 "아이가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골수를 다시 기증하기 위해서였다. 이번엔 이틀에 걸쳐 목에서 400㎖의 골수를 뽑아냈다.

"두번째 기증 때는 전신마취를 하지 않았어요. 목 정맥에서 골수를 채취했는데 통증이 거의 없어 헌혈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김 대위는 자신의 골수를 받은 아이가 완쾌될 때까지 몇번이라도 더 골수를 기증하겠다고 했다. 1999년 충주대 기계설계학과 졸업 뒤 군복무를 시작한 김 대위는 다음달 제대를 앞두고 있다. 군복무 도중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과정 한 학기를 남겨둔 그는 산업안전 분야의 공무원으로 일하는 것이 꿈이다.

◇골수(조혈모세포) 이식=백혈병.재생 불량성 빈혈 환자를 위한 치료법이다. 골수를 주고 받으려면 혈액형이 아닌 백혈구형(HLA.백혈구 항원형)이 서로 일치해야 한다.

현재 골수 기증을 전제로 자신의 백혈구 형을 조혈모세포은행협회에 등록한 사람은 모두 5만5771명. 일본(18만명).대만(22만명).미국(300만명)에 비해 훨씬 적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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