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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DJ 서거, 화합을 향한 ‘진정한 출발점’ 삼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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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김대중(DJ)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이 어제 서거했다. DJ는 음악감상실의 DJ(disk jockey)처럼, 오랜 세월 역사의 교향곡과 소품을 들려주었다. 어떤 것은 감미로웠고, 어떤 것은 시끄러웠다. 그는 갔지만 멜로디는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대통령 김대중’은 5년(1998~2003)이었지만 ‘정치인 김대중’은 50여 년이었다. 그는 6선 의원을 기록했고 네 번이나 대통령 후보를 지냈다. 다른 전직과는 달리 그는 대통령을 물러나서도 정치를 떠나지 않았다. 남북·사회 갈등 문제에서부터 최근의 ‘이명박 독재정권’ 논란에 이르기까지 그는 정치 영역을 넘나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멀리 갔다고 여겨본 적이 없다. 그랬던 DJ가 파란만장했던 영욕의 삶을 뒤로 두고 영원히 떠난 것이다. 석 달 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이라는 충격적인 형태로 떠났다. 2009년 여름 한국에는 이렇게 현대사의 물결이 굽이치고 있다.

공과를 떠나 그가 형성한 뿌리·줄기·가지의 깊이와 크기로 볼 때 DJ는 현대사의 거목이다. 그의 인생에는 현대사가 압축돼 있다. 그는 평생 투쟁과 핍박, 패배와 승리, 화합과 갈등이라는 회전목마를 타고 역사의 축을 격렬하게 돌았다. 그래서 그의 자취에는 한국사회의 ‘문제’와 ‘해법’이 동시에 숨어 있다. 공과를 차분하게 평가하고 서거를 역사 발전의 비료로 삼는 일은 이제부터 한국 사회의 몫이다.

DJ는 투쟁했으며 박해를 받았다. 61년 민의원에 당선되자마자 박정희의 쿠데타로 의원직을 잃었다. 이후 박정희의 개발독재와 대북 강경 정책에 맞섰다. 경부고속도로를 반대하고 향토예비군 폐지를 주장했다. 71년엔 반대세력을 대표하는 대통령 후보가 됐고 투쟁을 거듭할수록 민주화 세력의 리더로 떠올랐다.

일본에서 중앙정보부에 납치돼 끌려오고 감옥에 가기도 했다. 80년엔 신군부 정권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의 수난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중요한 동기였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민주화 투쟁이 개발독재·산업화보다 우월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DJ가 육체적 신고(辛苦)를 통해 한국인에게 ‘민주화’라는 개념을 심어준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DJ는 패배하기도, 승리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열린 87년, 그는 김영삼과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해 5공 신군부의 권력승계를 허용하고 말았다. 민주화 세력의 집권 기회가 날아가버린 것이다. DJ는 책임의 반을 안고 가야 했다. 하지만 희생과 투지로 승리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는 90년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합당에 맞서 투쟁했다. 국토의 구석으로 몰린 호남세력과 진보세력을 이끌고 그는 싸웠다. 13일간의 단식투쟁으로 지방자치제를 실현시켰고 마침내 98년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이 되자 DJ는 필생 과업으로 여겼던 대북 화해에 매진했다. 그는 북한 지도자와 회담한 첫 번째 남한 대통령이 됐으며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진정성만큼 방법론은 성숙하지 못했다. 수억 달러의 정상회담 뒷돈, 정체가 불투명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 합의, 그리고 이어진 대북 유화책은 지금까지도 논란과 갈등을 빚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누가 뭐래도 일관성 있게 대북 포용정책을 추진한 것은 남북관계에서 하나의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다. 원칙을 중시하는 것이 대북정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DJ는 여야 간·영호남 간 권력교체라는 역사의 숙제를 달성했다. 그리고 심혈을 기울여 국가를 외환위기에서 구해냈다. 아들들의 비리로 국민의 분노를 사기도 했지만 DJ 자신은 진보 정권의 재창출에 성공했다. 크게 봐서 순조로운 진행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겐 국가적 포용의 좋은 기회가 있었다. 산업화 세력의 역사적 의미를 인정하고, 이를 승계한 이명박 정권을 수용하며,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가적 통합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자격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막판에 자신을 키워준 ‘투쟁의 과거’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권을 독재로 규정하고 국민에게 일어나 행동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그에겐 나름의 논리가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헌신한 남북 화해가 위기에 처하고 진보파 노무현이 검찰수사를 받다 충격적으로 죽은 데에 마음이 크게 흔들렸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지역과 정파를 떠나 국가원로의 길을 걸었다면 그의 빈자리는 더욱 클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투쟁과 헌신이라는 추억과 ‘갈등의 치유’라는 숙제를 동시에 남기고 떠났다. 그의 고난에 슬퍼하고 그의 연설에 열광했던 호남인들, 김대중과 노무현을 쌍두마차로 여겼던 진보세력, 그저 DJ와 오랜 세월을 함께한 일반 시민, 그리고 DJ의 사고방식과 DJ의 언행에 분노했던 DJ 반대자들 모두가 DJ를 떠나보내고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완벽한 지도자는 없다. 시대상황에 따라 효용성이 다르고, 공적과 과실의 무게가 다른 지도자가 있을 뿐이다. DJ를 보다 더 정확한 역사의 저울에 올리려면 시간이 훨씬 더 필요할지 모른다. 거목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 늘 한결같은 자리에서 그의 영혼이 한국인과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