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화재배바둑 결승1국 관전기]이창호 공격변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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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이창호의 패인은 무엇일까. 흉내바둑일까. 그럴 리 없다.

흉내바둑 그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며 흉내를 그만둔 타이밍도 좋았다.

이날의 이창호는 어딘지 달랐다.

전법이 달랐고 승부호흡과 자세에서도 희미하나마 변화의 기운이 감지되었다.

산처럼 언제나 그곳에 있던 이창호9단이 드디어 변신의 용틀임을 시작한 것일까. 5번기에서 단 한판을 진 걸 가지고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9단의 한마디가 뇌리를 스친다.

"변신의 욕구를 느낀다" 고 그는 말했었다.

정상 (頂上) 의 이창호가 느낀 변신의 욕구. 혹 패인은 그곳에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대국일인 지난 11월 26일 오전 5시45분. 결승전을 앞두고 긴장과 고요속에 잠들어 있던 삼성화재 유성연수원의 숙소에 돌연 음악이 터져나왔다.

스피커로 10분 넘게 기상음악이 울려퍼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이창호가 아침잠을 설칠까 걱정했다.

또 예민한 성격의 마샤오춘 (馬曉春) 도 걱정이었다.

나중에 이9단은 "무슨 음악 말인가요" 하며 되물었다.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음악소리는 듣지도 못했던 것이다.

馬9단은 이곳의 규칙이고 모두 듣는 것인 만큼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란 사람다운 대답이었다.

9시30분에 대국개시. 돌을 가려 馬9단의 흑으로 몇 수가 진행되고 있는데 검토실의 누군가 "흉내 바둑이다" 하고 외쳤다.

이창호가 따라두고 있었다.

12수까지의 흑백이 똑같았다.

흉내바둑이란 판을 좁혀 포석에서의 격차를 없애려는 의도. 그러나 상수는 거의 쓰지않는 수법인데 세계최강 이창호가 웬일일까. 李9단은 지난해 삼성화재배 준결승전에서 馬9단에게 호되게 당한 일이 있다.

3백13수에 끝난 바둑을 296수에 가서야 겨우 역전시켜 반집을 이겼다.

그때의 지긋지긋한 고생은 모두 초반의 실패가 원인이었다.

비록 10연승을 거두고는 있지만 언제나 찜찜한 마샤오춘. 그에게 초반 선제점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바로 흉내바둑이었던 것이다.

14수에서 흉내는 끝났다.

그런데 이9단은 제16수에서 흑진속으로 깊숙이 덤벼들어 사람들을 또한번 놀라게 했다.

이창호는 남의 진영에 먼저 뛰어들지 않는다.

침투 및 탈출에 능한 조훈현이나 조치훈과 달리 이창호는 끝끝내 파괴의 유혹을 뿌리치고 상대가 나의 진영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이9단이 이날은 달랐다.

오후가 되자 판은 어느덧 백의 실리와 흑의 두터움으로 갈라서게 됐다.

馬9단이 극단적인 실리파임을 감안할 때 예상외의 흐름이었다.

조훈현9단은 "서서히 이창호 스타일로 흘러가는 것 같다" 고 했다.

장기전으로 이끌어 미세하게 승리하는 이창호 스타일은 언제나 신화적인 믿음을 준다.

그래서 이9단이 대마에 가일수를 할 때도 검토실에선 "벌써 계산서가 나왔나" 하며 웃었다.

그러나 이 수는 대완착이었고 이 한수로 흐름은 급변했다.

기회를 잡은 마샤오춘이 패를 걸며 강수로 나오고 이바람에 판은 아수라의 혼돈에 빠져들었다.

이 와중에서 이9단은 두번의 결정적인 오판을 한다.

84수부터 일찌감치 초읽기에 몰린 탓도 있지만 두터움을 위주로 하는 이9단이 '속도' 와 '엷음' 으로 승부한 것이 패인일 수 있었다.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더 있다.

이창호도 질 수 있다는 점이다.

1백59수에서 돌을 던진 이창호는 복기를 끝낸 뒤 검토실에 내려오지 않고 방으로 직행했다.

대 이창호전 10연패의 악몽을 떨치고 승리를 거둔 마샤오춘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중국으로 긴 통화를 하고 있었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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