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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걷는 자들에게, 제주는 속살을 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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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서귀포시 효돈동 ‘쇠소깍’.
서귀포시 하효동과 남원읍 하례리 사이로 흐르는 효돈천 하구다. 한라산 계곡에서 내린 물줄기가 지하층을 따라 흐르다 하류에서 물이 솟아나며 바닷물과 만나는 곳. 바로 앞바다에 무인도인 섶섬의 풍경까지 펼쳐진다. 계곡의 풍경이 아름다워 비경으로 손꼽히지만 간선도로의 길목이 아닌 꼬불꼬불한 해안길을 따라 가다 만나기에 제주토박이도 아는 이가 드문 장소다. 7일 오전 10시 이곳에 2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제주올레를 찾는 ‘올레꾼’들의 발길이 올해 들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7월 제주시 우도에서 열린 우도올레 걷기 행사 참가자들이 우도봉을 향해 난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다. 멀리 제주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올레 열풍’을 몰고 온 사단법인 제주올레가 여름휴가철을 맞아 마련한 ‘방학올레 걷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자 현장을 찾은 사람들이다. 작은 배낭 하나 둘러메고 생수 한 병에 안내지도 한 장 정도를 손에 쥐었을 뿐. 부모의 손에 이끌려 온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보태 제주의 웬만한 관광지에서조차 볼 수 없는 활기가 넘쳤다.

설렘과 기대 속의 첫 발걸음-. 아무도 재촉하는 이 없고, 바삐 서둘러 갈 일도 없이 그저 걷는 이들의 행렬은 이날 서귀포에선 보기 드문 진풍경이 됐다. “이추룩(이렇게) 우리 동네 구경하는 사람도 이수과(있습니까). 보긴 좋은게 마시(좋네요).” 부근을 지나던 50세 무렵의 한 주민은 연방 이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하지만 정작 더 놀란 것은 그 길을 걷던 사람이었다. 인적이 드문 해안 길을 따라 사진으로나 봤던 정방폭포와 천지연폭포·외돌개를 지척에서 만난 행렬은 곳곳에서 탄성을 내질렀고, “여기가 한국 땅이냐”는 아이들의 맞장구로 이어졌다. 걷기를 끝내고 “그동안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며 “제주에 감사하다”는 40대 부부의 눈엔 진한 감동까지 묻어났다.

‘올레’를 밟은 사람은 달라진다. ‘간세다리’(게으른 사람)의 마음으로 제주 땅을 걷다 보면 생각도 달라진다. 바람이 몰아칠 때 ‘곶자왈(천연원시림지대)’을 만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오름(기생화산)’을 곁에 끼고 지나다 보면 스스로를 어느덧 잊게 되더란다. 입소문이 꼬리를 물다 보니 ‘올레 걷기’ 열풍은 올여름 제주의 관광패턴까지 뒤바꿔 놓고 있다.

“부부 사이, 긴 얘기 나눌 기회”

8일 서귀포시 효돈동 ‘쇠소깍’ 주변에서 열린 ‘방학올레 걷기 행사’ 참가자들이 녹음이 우거진 효돈천을 따라 이어지는 올레를 걷고 있다. 제주=주현식 프리랜서

설렘과 기대는 사실 그리 오래 가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도 5~6시간의 강행군으로 이어지다 보면 발에 물집이 생기고 종아리도 당겨 온다. 게다가 땡볕까지 내리쬐면 흐르는 땀으로 온몸이 뒤범벅이 돼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올레를 걸은 사람은 예외다. 이날 오후 3시30분 종착지인 서귀포 해안의 외돌개. 2~5명씩 14.4㎞ 구간의 걷기를 마무리하고 벤치에서 한숨을 돌리고 있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보이지만 모두들 표정이 밝다.

금융기관에서 일한다는 서영상(33·부산시 수영구 광안동)·이인혜(28)씨 부부는 이날 처음으로 올레를 걸었다. 남편의 제안으로 1박2일간의 ‘제주 땅 밟기’를 생각하곤 이날 오전 부산을 떠나 제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피부가 발갛게 타면서 이 부부는 걷기 초반 “쭉 뻗은 길을 질러가면 될 텐데 왜 이리 꼬불꼬불한 길을 돌아가는가?”란 의문이 생겼단다. 하지만 종착지에 이르자 의문은 풀렸다. 서씨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큰 감동을 느꼈다. 앞으로 우리 부부가 살아갈 인생의 좌표를 얻은 느낌”이라며 “이제 제주를 마음의 고향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4~9일 5박6일간의 제주휴가 계획을 세우고 이날로 3일째 올레길을 걷는 최원선(41·회사원·경남 창원시 상남동)·박언선(39)씨 부부는 아예 ‘올레 매니어’가 됐다. “14년 전 신혼여행으로 처음 제주에 왔죠. 그때는 택시 타고 다니면서 기사 분이 가라는 관광지에 가고, 서라는 곳에 서서 사진을 찍고 돌아왔습니다. 그냥 풍경이 좋은 섬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내 박씨는 “길을 걷다 만나는 진기한 꽃과 풀을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다. 지척에서 높은 파도를 만난 데다 길을 물어보며 걷다 보니 제주가 성큼 가까워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 부부는 수소문 끝에 하룻밤 3만원인 민박집에 머무르며 휴가 마지막 날까지 올레를 걸을 계획이다. “부부가 매일 5시간 이상 이렇게 많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겠느냐?”는 게 이들의 반문이다.

박씨에겐 이날 제주토박이 친구도 생겼다. 어린이 공부방을 한다는 이은희(38·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씨가 길을 걷다 이들과 몇 마디를 나누게 됐고, 걷기 내내 이들에게 ‘제주도’를 알려준 동반자가 됐기 때문이다. 이씨는 “올레를 걷다 스스로도 제주를 너무 모르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며 “처음 걸어보는 올레지만 더 많은 이야기를 제주 밖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연내 모든 올레코스를 돌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두 아이를 위해 올레를 찾은 교사 아빠도 있다. 황정환(42·부산시 사상구)씨는 중학 1학년인 딸 준령(13)양과 초등 5학년인 아들 인성(11)군을 데리고 이날 올레를 걸었다. 황씨는 “엄마가 바쁜 일이 있어 함께 올 수 없었지만 그래도 꼭 아이들과 이 길을 걷고 싶었다”며 “수많은 학원을 이리저리 뺑뺑이 돌고, TV와 인터넷에 빠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이런 색다른 경험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물론 그의 기대대로 아이들은 “힘들었지만 너무 좋았다”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올해만 9만 명 다녀가
올레는 집으로 가는 골목길을 뜻하는 제주사투리다. 집으로 가는 골목-. 4·3사건이란 참혹한 현대사의 비극을 간직한 제주에서 1940~50년대 올레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부모들은 “올레 나가지 말라”고 아이들을 단속했다. 집 밖에서 놀다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던 때였기 때문이다.

거꾸로 60~80년대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올레 나강(나가서) 놀라”고 가르쳤다. 근대화·산업화의 열기가 한창일 때 직장과 가사일로 바쁜 제주의 부모들은 아이들과 놀아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올레에서 친구를 사귀었고, 세상의 눈을 떠가는 정보를 깨치기 시작했다. 물론 올레 너머로 난 ‘신작로’ 길을 지나는 관광버스 행렬은 아이들에게 신기한 장면들이었다. 그 시절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올레 밖 바깥 사람들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올레는 제주관광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올레는 2007년 9월 처음 코스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와 서귀포시의 추산에 따르면 2007년 올레코스를 찾은 관광객은 3000여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해 1년간 3만여 명이 올레 열풍에 동참했고, 올해의 경우엔 7월 말까지 벌써 8만~9만여 명이 올레 걷기를 체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기는 여행사에서 감지된다. 강창진 가교여행사 대표는 “‘올레길을 걷고 싶다’ ‘올레길을 안내해 달라’는 문의가 수도 없이 이어진다. 한여름철인데도 예약을 문의하는 사람 중의 절반이 그렇다”며 올레의 인기를 전했다. 안은주 제주올레 기획실장은 “제주의 속살을 느끼며 걷는 매력이 충분한 감동을 줄 것이란 예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많은 관광객으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다”며 “우리도 상당히 고무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경제 파급효과도 높지만 무엇보다 더 지역밀착형이란 사실도 흥미롭다. 양동곤 제주도 관광정책과장은 “올레 체험객들의 하루 지출경비가 7만6000원 정도로 분석돼 올 상반기에만 60억~70억원에 이르는 돈을 서귀포 지역에 뿌린 것으로 보인다”며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특급호텔과 골프장 등 대규모 유명시설에서 쓰는 돈이 아니라 대부분 소규모 음식점과 민박, 구멍가게, 버스·택시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데 돈을 쓰고 있어 지역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소득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서귀포시는 올레 열풍 이어가기에 더 적극적이다. 김민하 서귀포시 슬로관광도시육성팀장은 “올레를 통해 제주특색적인 체험의 기회를 늘리고자 걷기코스에 편의시설을 더 늘리는 것은 물론 소규모 민박, 무인카페, 특산물직판장 등의 테마사업 개발에 나서 지역에 대한 신뢰와 친화를 더 쌓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의근 탐라대 관광학부 교수는 “느림의 미학 속에서 즐기는 올레 여행은 제주의 자연과 역사, 문화를 교감할 수 있는 최고의 관광상품이자 지역의 경제·문화와 공생할 수 있는 관광패턴”이라며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는 문화상품으로 자리매김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제주=양성철 기자 ygodo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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