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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경평축구 부활 움직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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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나라에서 축구경기가 처음 열린 것은 1906년 3월 11일이다.

이날 서울 삼선평에서 대한체육구락부와 황성기독청년회 사이에 축구경기가 열렸다.

그 후 축구는 급속도로 보급돼 가장 대중적이자 인기 있는 스포츠 종목으로 자리잡았다.

당시에도 야구.농구.육상 등 여러 종목이 행해졌지만 축구의 인기를 따르지는 못했다.

초기에는학교를 중심으로 학생축구가 활발했으나 점차 성인축구로 발전했다.

1930년대 전국도시대항 축구대회는 국민적 관심사였다.

도시대항 축구대회 탄생의 계기가 된 것이 경평축구다.

1929년 10월 8~10일 서울 원서동 휘문 (徽文) 학교 교정에서 열린 제1회 대회는 매일 7천여 관중이 운동장을 가득 메울 만큼 인기였다.

3차전을 치른 결과 평양이 경성을 2승1무로 눌렀다.

이듬해 11월 28일부터 사흘 동안 열린 제2회 대회는 경성운동장에서 열렸다.

제1회 대회에 출전한 팀이 약체였다는 비난을 들은 경성은 이번엔 명실상부한 '전경성군 (全京城軍)' 을 구성했다.

시합결과는 2승1패로 경성의 승리. 특히 경성은 최성손.채금석.김성태.김용식 등 경신 (儆新) 학교 출신들이 콤비를 이뤄 눈부신 짧은 패스와 빠른 공격으로 강한 투지의 평양을 요리했다.

경평축구는그 후 중단됐다가 1933년 재개됐다.

4월 6일 평양 기림리 (箕林里) 운동장에서 열린 1차전에서 평양은 경성에 2대3으로 석패했다.

1차전에서 평양이 패했다는 소식에 분노한 평양시민들이 2차전 설욕을 보기 위해 몰려들어 평양시내는 철시상태였다.

사투 끝에 2대2 무승부. 이날 평양선수들이 어찌나 거칠었던지 경성선수들 다수가 부상을 해 3차전 보이콧 움직임까지 있었다.

3차전에서는 평양이 3대0 승리. 열광한 평양시민들은 거시적 (擧市的) 으로 축하행사를 벌였다.

경평축구는 모두 8회에 23차례 경기가 치러졌다.

종합전적에서는 10승7무6패로 평양이 앞섰다.

1946년 3월 해방의 감격을 안고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마지막 대회때는 평양선수들이 38선을 넘어 육로로 서울에 왔다.

그러나 이를 끝으로 경평축구는 중단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세워지는 2002년 월드컵 주경기장 기공식장에서 고건 (高建) 서울시장은 평양측에 경평축구 부활을 제안했다.

소떼 북송과 금강산관광으로 열린 남북교류의 길이 축구로 다져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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