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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터지 소설' 식지않는 열풍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팬터지 소설의 인기가 뜨겁다.

PC통신 하이텔 연재 당시부터 폭발적 조회수를 기록한 '드래곤 라자' (황금가지刊.이영도 작.전12권)가 첫권이 나온지 다섯달만에 35만여부가 팔린 데 이어 완간을 눈앞에 둔 '용의 신전' (자음과모음刊.김예리 작.전7권) 도 두 달 새 12만부의 판매고를 올렸다.

PC통신출신 작가들의 창작물 4, 5편이 계약을 마치고 출판대기중인 것까지 감안하면 이같은 인기의 파장은 간단치 않다.

이들 팬터지 장르의 원형으로 알려진 '반지전쟁' (예문刊.톨킨 작) 도 출간된 지 8년만인 최근 5권짜리로 표지를 바꿔 다시 나왔다.

팬터지 소설의 이같은 인기는 같은 모험서사물이라는 점에서 80년대 중반 전성기를 누린 무협지와 비교해 볼만하다.

팬터지 소설의 무대가 인간.드래곤.엘프.드워프.오르크 등 다양한 종족이 공존하는 가상의 세계인 것처럼 무림 고수들이 들끓는 중원 (中原) 역시 가상의 공간.

무협지의 시원인 '삼국지' 의 웅장하고 치밀한 서사구도, 생동감 넘치는 다양한 인물 유형에 견주어 '반지전쟁' 이 '서양의 삼국지' 로 불리는 것 역시 기억할 만한 대목이다.

그러나 무협지의 전형적 주인공이 비범한 자질을 갖고 태어나는 데 비해 '드래곤 라자' '용의 신전' 의 주인공은 지극히 평범한 10대 소년이다.

권선징악.사필귀정의 논리가 지배하는 무협물 주인공이 자신의 목표에 일로매진하는 인간형인데 반해 판타지의 주인공은 곧잘 회의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용의 신전' 에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게 목표인 '랜스' 같은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작가의 시선은 그런 랜스를 가끔 우스꽝스런 고집쟁이로 그려낸다.

인간인 랜스, 엘프인 데이미아, 드워프인 툴위그는 '네 개의 열쇠' 를 찾는 목표에서는 같은 편이지만, 이와 무관한 인간들 사이의 싸움에서까지 한 편인 것은 아니다.

'드래곤 라자' 에서 아무르타트같은 용이 인간의 적이 된 것은 절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인간과 용을 소통시켜주는 '드래곤 라자' 를 잃었기 때문이다.

선과 악, 적군과 우군의 경계가 명료하지 않은 팬터지 소설의 특색은 기존의 정치.사회적 대립구도가 붕괴된 90년대의 시대적 맥락과 맞아떨어진다.

다양한 종족이 등장하는 설정부터가 '공존의 세계관' 을 배려하고 있는 것이다.

팬터지 소설의 주요 독자는 컴퓨터게임과 일본만화에 익숙한 20세 전후 젊은이들. 드워프나 엘프의 등장은 여느 소설 독자보다 게임매니어들에게 낯익다.

롤플레잉 게임이 '반지 전쟁' 에서 영감을 얻어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10년전부터 팬터지 열풍이 분 일본의 경우 같은 줄거리로 소설.인쇄만화.애니메이션.게임 시나리오를 넘나드는 유통방식이 보편적이다.

최근 '드래곤 라자' 의 게임 시나리오 계약은 국내에서도 이같은 유통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부풀리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기대가 정작 '좋아서' '재미로' 인세도 없는 통신연재를 시작한 작가들을 바꿔놓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매니어적인 아마추어리즘이야말로 팬터지 소설 인기의 또다른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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